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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쓰레기산 악몽 막겠다”던 환경부, 法개정 포기… 피해 속출 우려

입력 | 2023-12-28 03:00:00

투기범에 처리비용 받기 힘들자
애꿎은 땅주인에 수억 원씩 부과… 최근 4년 54명에 337억 청구돼
토지압류 불이익속 법마련도 무산
전문가 “땅주인에 면책기회 줘야”



2019년 4월 문수용 씨가 소유한 경북 경산시의 한 토지에 쓰레기 불법 투기 조직이 약 3000t에 달하는 폐기물을 쌓아둔 모습. 이들이 쓰레기를 몰래 버린 채 잠적하면서 문 씨는 경산시로부터 쓰레기 처리 비용 4억9051만 원을 납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문수용 씨 제공


“저 같은 피해자가 계속 나오도록 방치하는 거 아닌가요.”

대구에 거주하는 문수용 씨(82)는 환경부가 추진하겠다고 밝혔던 ‘쓰레기산 피해자 방지법’이 무산됐다는 소식을 듣고 한숨을 쉬며 이같이 말했다. 문 씨는 2019년 경북 경산시에 있는 자신의 땅에 쓰레기산이 생긴 후 경산시로부터 행정대집행 비용 약 5억 원을 내라는 명령을 받고 2년 넘게 소송을 진행 중이다.

정부가 올 초 “(문 씨 같은) 선의의 피해자를 막겠다”며 추진하던 폐기물관리법 개정이 무산된 것으로 동아일보 취재 결과 확인됐다. 이에 따라 폐기물 처리 비용이 애꿎은 땅 주인에게 부과되는 사태도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 환경부 “피해자방지법 추진 안 해”

동아일보가 지난해 12월 9, 12일 두 차례에 걸쳐 보도한 ‘쓰레기산의 덫’ 기사. 

현행 폐기물관리법은 쓰레기 투기범뿐 아니라 토지 소유자까지 폐기물 처리 명령 대상으로 규정해 같은 책임을 지우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잡기도, 돈을 받아내기도 어려운 투기범 대신 비용을 청구하기 쉬운 땅 주인에게 구상금을 청구하는 일이 반복돼 왔다. 2019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땅 주인 54명에게 청구된 금액이 337억 원에 달한다.

지난해 12월 본보에서 이런 문제를 지적하자 올 2월 환경부는 “선의의 피해자를 막기 위해 각 지자체가 불법 폐기물 투기 사실을 제보받거나 확인한 경우 즉시 땅 주인에게 통보하도록 폐기물관리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법 개정은 백지화됐다. 환경부 관계자는 27일 “투기가 얼마나 발생했을 때 누구에게,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 등의 내용을 구체화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며 “그 대신 쓰레기산이 발생할 경우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땅 주인에게 알리라고 구두로 전달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피해자들은 “언제 어떻게 알리라는 세부 기준이나 지침도 없이 막연히 알리라고 하는 게 실효성이 있겠느냐”는 입장이다.

문 씨의 경우 노점상 등을 하며 모은 돈으로 산 노후 대비용 땅을 2019년 4월 1일 손모 씨(63)에게 공장 부지로 빌려줬다. 쓰레기가 쌓이기 시작한 걸 목격한 주민들이 경산시에 신고했지만 경산시 공무원은 구두 지도만 하고 돌아갔다. 이후 여러 차례 신고가 이어졌지만 경산시 측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문 씨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투기범 일당은 2019년 4월 15∼19일 집중적으로 약 3000t의 쓰레기를 투기한 후 잠적했다.

● 전문가 “무고한 땅 주인 면책 기회 줘야”

그러자 경산시는 문 씨에게 2020년 5월까지 폐기물을 처리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어 2020년 6월 행정대집행으로 쓰레기를 처리하며 비용 4억9051만 원을 청구하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대해 국민권익위원회는 같은 해 “조치 명령을 재검토하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권익위는 “부득이하게 비용을 청구할 경우 경산시가 무단 투기를 인지하고도 행정조치를 소홀히 해 늘어난 쓰레기양을 감안해 액수를 정하라”고도 했다.

하지만 경산시는 권익위 의견에 강제성이 없다며 2021년 문 씨의 토지를 압류했다. 문 씨는 납부 명령을 취소해 달라며 행정소송을 냈지만 지난해 7월 패소했고, 경산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제기했지만 지난달 2심에서 법원은 경산시 손을 들어줬다.

항소심 재판부는 “경산시 측이 소극적으로 업무를 처리한 건 인정된다”면서도 “폐기물관리법에서 무단 투기를 적발한 공무원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쓰레기산 문제를 추적해 온 환경운동가 서봉태 씨는 “무고한 땅 주인에게 면책 기회를 주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미송 기자 cm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