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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민병갈 천리포수목원장님에게 보내는 계절 편지[김선미의 시크릿가든]

입력 | 2023-09-10 09:00:00


생전의 민병갈 천리포수목원 설립자

민병갈 원장님. 선생님이 여든한 살 나이로 하늘나라 가시고 어느덧 21년이 흘렀네요. 달력이 9월을 말하기 시작할 때, 원장님이 생전에 정성껏 가꾸신 천리포수목원에 다녀왔습니다. 연못의 수련이 별처럼 빛나는 입구 정원부터 꿈결이 펼쳐졌어요. 햇빛에 반짝이는 노란색과 오렌지색 상사화, 에메랄드그린 색의 부탄 소나무, 지는 모습이 격조 있는 수국, 손등을 스치는 바람과 새 소리….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감각들이 피어나고 있었어요. 두 계절의 식물을 만날 수 있는 간절기의 축복이죠. 원장님 동상 옆에 가만히 앉아보았습니다.

천리포수목원 민병갈 설립자 동상. 태안=김선미 기자

천리포수목원 입구 정원의 수련들. 태안=김선미 기자

원장님, 정말 고마워요. 한국으로 귀화해 이 땅에 묻힌 첫 서양인으로서 우리 국민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을 남겨주셔서요. 살아갈 힘이 필요할 때 누구든 찾아올 수 있는 정원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요. 게다가 바다와 숲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정원이라니요. 천리포 해변과 접한 수목원 내 어린이정원에는 지금 팜파스 그라스가 활짝 폈어요. 깃털 모양의 풍성한 이삭이 초가을 바람에 살랑살랑…. 그런데 참, 이상해요. 원장님. 천리포수목원에서는 발걸음도 생각도 속도가 늦춰져요. 안단테(andante), 안단테~.

여름과 가을 사이의 팜파스 그라스. 태안=김선미 기자

원장님은 천리포수목원에 두 개의 연못 정원을 만드셨죠. 빅토리아 수련이 가득한 큰 연못 정원과 낙우송이 물속에 심어진 작은 연못 정원. 저는 이곳에서 미국 여류시인 메리 올리버(1935~2019)의 시들을 떠올렸어요.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소도시 프로빈스타운에서 날마다 숲과 바닷가를 거닐던 그녀가 풀어냈던 풍경들과 닮았기 때문인가 봐요.

‘그레이트 연못에 해 떠오르네/오렌지빛 가슴 무성한 소나무에 긁혀, (중략) 한편 내 주위에선 수련이 다시 피어나네.’ (메리 올리버, ‘그레이트 연못에서’ 중)

천리포수목원 큰 연못 정원. 태안=김선미 기자

그녀가 생전에 원장님과 인연이 닿아 ‘천리포의 그레이트 연못’에 와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곳에서 ‘서쪽 바람’과 ‘천 개의 아침’을 맞았다면 어땠을까요(‘서쪽 바람’과 ‘천 개의 아침’은 메리 올리버의 시 제목이에요).

천리포수목원 작은 연못 정원. 태안=김선미 기자

<아침 산책>
-메리 올리버

감사를 뜻하는 말들은 많다.
그저 속삭일 수밖에 없는 말들.
아니면 노래할 수밖에 없는 말들.
딱새는 울음으로 감사를 전한다.
뱀은 뱅글뱅글 돌고
비버는 연못 위에서
꼬리를 친다.
솔숲의 사슴은 발을 구른다.
황금방울새는 눈부시게 빛나며 날아오른다.
사람은, 가끔 말러의 곡을 흥얼거린다.
아니면 떡갈나무 고목을 끌어안는다.
아니면 예쁜 연필과 노트를 꺼내
감동의 말들, 키스의 말들을 적는다.

보랏빛 맥문동과 녹음이 어우러진 수목원. 태안=김선미 기자

천리포수목원에서 보낸 한나절이 왜 그토록 꿈결 같았나, 곰곰이 복기해보았습니다. 감사와 감동의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24세 장교로 인천에 첫발을 디뎠던 원장님은 미국인 칼 페리스 밀러였죠. 한국의 매력에 이끌려 1950년대부터 한국은행에서 일하다가 1970년대에 천리포수목원을 일구고 한국인으로 귀화했죠. 수목원 내 민병갈 기념관에 쓰여있는 원장님 말씀에 뭉클해졌습니다.

민병갈기념관 창문에 쓰여있는 문구. 태안=김선미 기자

“내가 수목원을 개발하기로 결심한 동기는 한국의 어디에도 수목원이 없었기 때문이며, 또한 수목원 개발 및 조성이 나를 키워준 나라 한국에 가치 있는 일로 남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맞아요. 원장님. 한국의 국립 광릉수목원은 1987년에야 문을 연 걸요.

이 계절의 인사를 건네는 상사화. 태안=김선미 기자

18만 평 천리포수목원(2만 평만 개방 중)에는 1만6862종의 식물이 살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식물 종을 보유한 수목원이죠. 원장님이 1978년부터 세계의 저명한 수목원들과 잉여 종자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수종을 확보한 덕이지요. 목련나무, 감탕나무, 동백나무, 무궁화나무, 단풍나무…. 해외에서 더 인정받는 자랑스런 천리포수목원의 나무들입니다.

무궁화를 집중 소개하는 천리포수목원. 태안=김선미 기자

천리포수목원에는 사람으로 치자면 X세대 나무들이 살고 있더라고요. 원장님이 천리포에서 수목원을 조성하기 시작한 게 1970년, 천리포수목원 재단법인 등록을 마친 게 1979년입니다. 씨앗부터 키운 나무들이 지금 울창한 숲을 이뤘습니다. ‘나알못’(나무를 알지 못하는) 금융인이었던 원장님이 50세에 나무 심는 일을 시작해 자나 깨나 나무 공부를 했다는 사실이 존경스럽습니다. 50세에도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다고 50세 X세대에게 희망을 주시는군요.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 가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1970년 첫 삽질을 시작한 천리포수목원. 태안=김선미 기자

<정원사>
-메리 올리버

나는 충분히 살았을까?
나는 충분히 사랑했을까?
올바른 행동에 대해 충분히 고심한 후에
결론에 이르렀을까?
나는 충분히 감사하며 행복을 누렸을까?
나는 우아하게 고독을 견뎠을까?

나는 그런 말을 해, 아니 어쩌면
그냥 생각만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사실, 난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아.

그러곤 정원으로 걸어 들어가지,
단순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정원사가
그의 자식들인 장미를 돌보고 있는.

천리포수목원의 일부인 낭새섬. 태안=김선미 기자

수목원 서해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은 다정한 느낌이었습니다. 하루 두 번 물길이 열리면 닿을 수 있다는 초록빛 낭새섬 때문이었을까요. 닭섬으로 불렸던 이 섬을 원장님은 천리포수목원으로 편입시키고 낭새섬이라고 고쳐 불렀죠.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닭을 잡아 생계를 잇느라 닭이라면 지긋지긋하셨다고요. 우리 자생식물이 심어진 이곳에 과거 살았다는 낭새(바다직박구리)가 다시 날아든다면 원장님이 하늘에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생전의 민병갈 천리포수목원 설립자

노란색 초가 형태의 민병갈기념관 앞에는 논과 연못이 펼쳐진다. 태안=김선미 기자

천천히 수목원을 거닐다 보면 원장님은 진정한 자연주의 정원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목원 조성 전부터 있던 논을 정원의 한 요소로 남겨두셨죠. 잔잔한 논 풍경이 다른 식물들을 돋보이게 하는 ‘주연 같은 조연’, ‘조연 같은 주연’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원장님은 수목원이 ‘식물들의 피난처’라며 관상을 위해 인위적으로 가지를 치지 말라고 하셨죠. 그래서인지 천리포수목원의 나무들에서는 자연스러움에서 나오는 품격이 느껴집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국제수목학회, 2000년)이라는 찬사가 그래서 나왔나 봐요.

가지를 늘어뜨려 아늑한 공간을 만드는 닛사 나무. 태안=김선미 기자

연못가의 울창한 ‘닛사’ 나무도 기억에 남습니다. 가지들을 풍성하게 아래로 늘어뜨려 안쪽에 널찍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마음 넉넉한 친구 같더라고요. 텐트를 친 모양새라 ‘텐트 트리’로도 불린다지요. 작은 묘목이 이렇게 거목으로 자라났습니다. 우리 삶도 이렇게 성장하고 있을까요. 누군가에게 아늑한 그늘을 만들어줄까요.

민병갈 원장이 완도에서 처음 발견해 세계 식물계에 널리 알린 완도호랑가시나무. 태안=김선미 기자

천리포수목원을 나서면서는 플랜트센터에서 작은 완도호랑가시나무 화분을 샀습니다. 원장님이 전남 완도에서 1979년 발견해 국제식물학회에 발표했던 바로 그 나무요. 크리스마스트리에도, 구세군의 상징인 ‘사랑의 열매’에도 사용되는 이 나무는 원장님을 통해 세계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공익재단 형태의 사립 수목원인 천리포수목원이 어떻게 유지 계승돼야 하는지 문득 걱정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원장님이 떠나신 지 21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래의 정원을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요.

지는 모습도 격조 있는 수국. 태안=김선미 기자

생전의 민병갈 천리포수목원 설립자

원장님과 함께 일했던 두 분의 말씀을 전합니다.

“민 원장은 엄청난 수집가이자 기록광이었다. 그가 남긴 방대한 자료가 후대에 유익하게 쓰일 수 있도록 박물관을 건립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선진국처럼 기업 후원이 뒷받침돼주면 좋겠다.”(임준수 천리포수목원 감사)

“미국 롱우드 가든과 영국 웨슬리 가든에서 교육받을 때 민 원장을 처음 만났다. 천리포수목원에서 일해달라는 제안을 받고 10년을 일하면서 그로부터 식물에 대한 열정을 배웠다. 사회 지도층일수록 민 원장처럼 정원과 식물을 사랑하는 ‘가슴’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는 그 점에서 아직 미흡하다.” (송기훈 미산식물원 대표)


한국의 석상들을 배치한 천리포수목원. 태안=김선미 기자

저는 가을이 무르익을 때 천리포수목원에 다시 찾아가려고 합니다. 후원회원으로 가입한 후 수목원 내 ‘가든 스테이’를 예약해놓았습니다. 바닷가 수목원 안 한옥이나 초가에서 노을을 감상하고, 손전등을 들고 밤의 정원을 거닌 뒤 다음 날 아침이슬 맺힌 정원을 고요하게 둘러보는 일만큼 최고의 호사가 또 있을까요. 원장님이 제2의 고국인 한국에 남기고 싶었던 선물도 ‘정원과 함께 하는 생활’ 아니었을까요.

천리포수목원의 한옥 가든 스테이. 태안=김선미 기자

내년 봄 목련이 가득 필 무렵에도 가겠습니다. 각별히 아끼셨다는 ‘라스베리 펀’ 목련, 딸기에 크림을 얹은 색 같다며 ‘스트로베리 크림’이라고 이름 붙이신 목련도 보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천리포는 계절마다 가봐야 한다고 말하나 봅니다. 천리포수목원을 아끼고 사랑하는 팬들이 많습니다, 원장님.


민병갈 천리포수목원장(1921~2002)의 인연들1. 장기영 전 한국은행 부총재(1916~1977)
한국은행 직장 후배인 민병갈 원장에게 자신의 만리포 별장을 수시로 내주었다. 민 원장은 이 별장을 드나들다가 지금의 천리포수목원 부지를 구입했다. 그동안 알려지기로는 지역 토박이인 한 노인이 딸 시집을 보낼 돈이 필요하다며 민 원장에게 수목원 부지를 사달라고 간청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임준수 천리포수목원 감사는 최근 기자를 만나 “땅을 팔았던 노인의 손녀가 우리 할아버지에게는 그런 딸이 없다고 하더라. 당시 미국인 잡지 기자가 지어낸 얘기 같다”고 했다. 진짜 사연은 하늘의 민 원장이 아실텐데.

2. 민병도 전 한국은행 총재(1916~2006)
민 원장은 한국은행에서 만난 민 전 총재와 의형제를 맺고 자신의 한국 이름을 ‘민병갈’이라고 지었다. 이름의 마지막 ‘갈’은 영어 이름 ‘칼’을 바꾼 것이다.

3. 서성환 태평양그룹(현 아모레퍼시픽그룹) 창업자(1924~2003)
1970년대부터 약용 식물로 한방 화장품을 개발하면서 민 원장과 가까워져 1979년 천리포수목원의 초대 재단 이사를 맡았다. 아모레퍼시픽이 제주도 황무지를 오설록 다원으로 일군 데에는 민 원장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친구끼리 선한 영향을 주고받은 모습이 수목원의 나무들을 떠올리게 한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