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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왜 전쟁 중 해임됐나[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입력 | 2023-08-04 14:27:00

[17회]





미국 뉴욕주의 육군사관학교 ‘웨스트 포인트’ 교정의 맥아더 장군 동상. 출처 영문위키



중국 신화통신이 맥아더 사령관 해임 소식을 해임 이틀 후 전하고 있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 항미원조기념관 전시. 단둥 = 홍진환 기자




 ●‘5성 장군 육군원수, 라디오로 해임 전해듣다’
1951년 4월 11일 오전 1시(미국 현지시간). 백악관 공보비서가 백악관에서 특별기자 회견을 갖고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의 해임을 발표했다. 시차가 있어 11일 오후가 된 도쿄의 라디오 방송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맥아더 해임 소식을 긴급 뉴스로 전했다. 맥아더는 일본 점령군사령관이어서 일본에서도 큰 관심이었다. 방송을 들은 맥아더의 부관 시드니 허프 대령은 맥아더의 아내 진 맥아더에게 전화해 해임 사실을 전했다. 맥아더는 아내로부터 자신의 해임 보도를 전해 들었다. 모스크바와 베이징(北京)에서는 기쁨과 환희로 종이 울리고 축제 기분에 들떴다.(맥아더, 267쪽)

맥아더는 회고록에서 해임을 전해 듣게 된 경위를 자세히 소개했다. 얼마나 갑작스럽고 어이없게 자신의 해임이 이뤄졌는지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상관 명령 불복종으로 군인이 해임되는 것은 큰 불명예임에도 한 번의 해명 기회도 주지 않고 자신을 해임한 것에 대해 후에 격렬히 비판했다.

트루먼은 당초 애치슨 국무장관이 무초 주한대사에게 명령서를 전문으로 보낸 뒤 마침 방한 중인 페이스 육군장관이 도쿄로 가서 직접 전달해 예우를 갖출 계획이었다. 그런데 시카코의 한 언론이 11일 조간으로 보도할 것으로 알려져 부득이 긴급 발표하게 됐다고 트루먼은 회고록에서 설명했다.(트루먼, 424쪽)





● “트루먼 탄핵하라”, 여론의 분노
많은 미국인들은 맥아더의 해임 소식에 항의해 전국에서 트루먼의 허수아비를 불태웠다. 국제부두 노조는 항의로 조업을 중단했다. 맥아더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을 때 50만 인파가 공항에서 도심까지 늘어서 환영했다. 뉴욕에서는 70만 시민이 종이 꽃가루를 뿌리며 영웅을 맞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 장군 귀국 환영 인파보다 2배는 많았다.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66%가 맥아더의 해임에 반대했다.

시사주간 타임은 “인기가 많은 사람이 그보다 훨씬 인기가 없는 사람에 파면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트루먼은 전형적인 소인배”라는 논평을 냈다.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은 “즉시 맥아더를 복귀시키라”고 주장했다.(핼버스탬, 938쪽). 맥아더에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퇴임 연설을 하고 해임 경위를 따지는 의회 청문회도 열기로 했다.(‘미래한국’, 2015년 4월 10일)

맥아더가 해임되자 일본은 천황이 직접 방문해 작별 인사를 했다. 일본과 한국 국회는 감사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을 위해 했던 일과 우정을 베풀어준 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며 “시간이 지나면 세계 역사상 탁월한 지도자 및 정치가로 더욱 빛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맥아더가 일본을 떠난 4월 16일 2백만 명의 시민이 미 대사관에서 아츠키 비행장까지 길에 늘어섰다. 맥아더를 태운 비행기는 후지산을 한 바퀴 돈 뒤 미국으로 향했다.(맥아더, 269쪽)


트루먼 대통령




● ‘맥아더 해임은 문민우위 헌법 수호 차원’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맥아더 육군원수가 공적인 직무와 관련된 문제에서 미국 및 UN의 정책을 성심껏 지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군 사령관이 법과 헌법에 의한 정책 및 명령에 의해 통할되는 것은 기본 원칙이다. 그가 나라에 바친 탁월하고도 유례없는 공헌에 깊은 감사의 뜻을 가지고 있어 해임 조치를 다시 한번 유감으로 생각한다.”

트루먼은 그가 명령에 따르지 않아 해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당시는 중공군의 4차 대공세 이후 약 2개월간의 ‘휴지기’였다. 하지만 곧 중공군이 70만 명을 동원한 ‘1차 춘계 대공세’를 벌이기 직전으로 6·25 전쟁은 급류속이었다. 그런데 16개국 UN군 수장이기도 한 장수를 전격 경질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해임 발표가 나오기 나흘 전인 4월 7일 국무부 국방부 합동참모본부의 간부 등이 모인 회의에서 맥아더 해임에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았다. 심지어 이미 2년 전 극동군사령관 등에서 해임되어야 했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트루먼에게 보고했다.

‘맥아더 해임’은 한국전쟁 수행 방식의 이견 때문만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수면 아래에서 잠재되어 있었다. 6·25 전쟁의 작전 범위를 둘러싼 이른바 ‘확전론’과 ‘제한론’의 갈등에서 임계치를 넘어 폭발했던 것이다.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 미국군 전승 충혼비. 지평리 전투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유엔군이 반격하는 전환점이 됐다. 그해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양평 = 구자룡 기자




● 트루먼의 휴전 의지 정면 거부한 맥아더
트루먼 행정부에서 맥아더 해임은 휴화산이었지만 해임 결단 이전 보름 남짓 기간에 벌어진 두 사건이 트루먼의 표현대로 ‘선을 넘은’ 계기가 됐다. 해임을 불러온 마지막 두 개의 폭탄이었다.

첫째는 맥아더가 트루먼의 휴전협상 의지를 정면으로 거스른 3월 24일의 성명. 트루먼은 3월 중공군에 대한 반격작전인 ‘리퍼 작전’ 성공으로 기세를 잡았다고 보았다. 공산군측이 군사적으로 승리할 수 없게 느끼는 이 때가 휴전협상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전쟁은 외교보다 군사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맥아더의 성명은 이랬다. “적의 인해전술은 우리 군대가 익숙해져 쓸모없게 되었다. 중국의 생산기반과 원료로는 중등 정도의 공군과 해군을 편성 유지하는 것도 부족하다. 대량파괴수단의 발전으로 단순한 병력수만으로는 약점이 만회되지 않는다. 군사작전을 중공 연안과 내륙기지까지 확대하면 중공은 군사적인 붕괴 위험을 면치 못할 것이다.”(트루먼, 416쪽)

밀리는 적을 확실히 밀어붙이고 중국 대륙까지 확전하자는 것이었다.

트루먼은 공산군이 38선 이북으로 후퇴한 뒤 평화적인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선언 초안을 준비해 참전국과 맥아더에게도 보냈었다. 맥아더의 성명은 휴전을 거부하는 확전 위협으로 간주됐다. 국무부는 우방국에 맥아더의 회견은 워싱턴의 승인을 받지 않은 독단적인 것이었다고 해명해야 했다.(김계동, 281쪽)

트루먼은 회고록에서 분개했다.

“외교정책에 관한 어떤 발언도 삼가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전적으로 무시한 행동이었다. 대통령이며 최고사령관인 나의 명령에 공개적으로 불복하는 것이었다. 이는 헌법에 따른 대통령의 권한에 대한 도전이자 UN의 정책을 우롱하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나는 그의 불복에 더 이상 관용을 베풀수가 없었다.”(트루먼, 417쪽)
그는 맥아더의 성명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말밖에 표현할 길이 없으며 미국의 전통적인 문민우위에 도전하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 내려고 애써 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맥아더를 용인하면 문민우위의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한 서약을 위배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트루먼에게 맥아더 해임은 헌법을 수호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1944년 10월 20일 필리핀 레이테섬 팔로 해변에 상륙하는 맥아더. 태평양 전쟁과 일본 점령군사령관, 한국 전쟁의 유엔군 사령관 등을 거쳐 해임이후 미국으로 돌아간 것은 14년 만이었다.




● “일개 장교가 극동의 황제가 되려는 것 용납할 수 없다”
휴전 노력에 반대하는 맥아더의 불복 사태 처리에 고심하던 트루먼에게 ‘마틴 편지 사건’이 터져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4월 5일 야당인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 조지프 마틴은 하원에서 맥아더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라며 공개 낭독했다. 대만 장제스(蔣介石) 정부를 지지하는 마틴이 2월 12일 하원에서 했던 “장제스 군대가 한국전에 사용되지 않은 것은 바보스러운 결정”이라는 발언에 대한 맥아더의 코멘트였다. 맥아더가 3월 20일 마틴에게 보냈던 것이었다.

“귀하의 견해는 논리적으로 모순되지도 않고 전통에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유럽에서는 외교관들이 입으로 싸우지만 여기서는 무기로 싸우고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패하면 유럽도 몰락이 불가피하다는 것, 여기서 이기면 유럽의 자유를 보존하게 되리라는 것 등을 깨닫기가 어려운 것 같이 보입니다. 승리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맥아더, 253쪽)

트루먼은 승리도 올바른 승리와 그릇된 승리가 있는데 맥아더가 마음에 두는 중국 폭격에 의한 승리는 그릇된 승리라고 했다. 그는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침공 기간 중 “나는 싸움마다 모두 격파했으나 어느 한 곳도 얻지 못했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하나의 전장에서의 승리는 그 자체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트루먼, 422쪽)”

맥아더의 편지가 공개된 날 트루먼은 일기에 “맥아더가 또다시 정치적인 폭탄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이번이 마지막 일격이 될 것 같다. 누가 봐도 확실한 불복종에 해당한다. 극동지역 고집불통 장군을 본국으로 불러들여야 할 것 같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적었다.(핼버스탬, 929쪽)

트루먼은 후에 사적인 자리에서는 더욱 격렬한 어조로 맥아더를 비난했다. “문제는 그가 식민지 총독, 즉 극동지역의 황제가 되고 싶어했다는 거야. 자기가 일개 육군 장교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상관은 바로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게 잘못이지.”(핼버스탬, 935쪽)
4월 9일 미 합참은 맥아더 해임을 건의하고 트루먼은 4월 11일 민간 및 군부참모들의 만장일치 지지로 해임 결정을 내렸다.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 맥아더기념관 앞의 동상. 웨스트포인트의 것을 그대로 본떠 제작됐다. 기념관에는 맥아더 자료를 담은 타임캡슐도 있다. 출처 맥아더기념관 홈페이지




● 트루먼과 맥아더의 오랜 신경전 
지휘 계통으로만 보면 군통수권자인 트루먼 대통령은 수차례 맥아더를 해임 혹은 경질할 수도 있었다. 태평양 전쟁의 영웅이자 높은 여론 지지를 받는 맥아더는 ‘전쟁에서는 내가 옳다’며 독자적인 행동을 하면서 갈등이 누적됐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같은 전과(戰果)가 맥아더를 ‘언터처블’의 지위를 갖게 했다.

#1. 6·25 전쟁에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를 참여시키는 문제를 두고 이견을 보인 가운데 1950년 7월 31일 맥아더가 대만을 방문해 장제스를 만났다. 장제스의 중국 본토 공격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자 “미국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대만에 대한 군사적 폭력 행위를 방지하는 문제로 대화가 국한됐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하며 무마해야 했다.(맥아더, 180쪽)

그는 회고록에서 이 방문 여파로 자신이 해임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그는 “일본과 싸울 때는 장제스와 손을 잡으면서 공산당과 싸울 때는 왜 손을 잡지 않냐”고 불만을 나타내고 “내가 공직에서 추방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은 분명했다”고 적었다.(맥아더, 185쪽)

#2. 맥아더가 1950년 8월 24일 미 해외참전군인회(VFW)에 보낸 메시지도 대만 문제로 트루먼과 갈등을 빚은 대표적인 사례다. 맥아더는 “대만은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서태평양에서 미국의 전진 교두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대만 방어를 반대하는 자들은 ‘패배주의자’‘유화주의자’라고 비판했다. 트루먼은 당시 맥아더를 해임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애치슨도 당시 맥아더의 메시지는 “‘이 나라의 대통령은 누구냐’하는 것에 대한 문제”라며 대통령에 대한 항명이었다고 했다.(애치슨, 550쪽)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 맥아더 기념관의 맥아더와 부인 진의 무덤. 출처 맥아더기념관 홈페이지




● 트루먼의 ‘언론 금족령’도 무시 
트루먼은 1950년 12월 5일, 해외 주재 외교관들에게 군사문제나 외교정책에 관해 미국의 언론기관과 직접 접촉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특정인을 지목한 것은 아니지만 맥아더를 겨냥한 것이었다.

앞서 12월 1일 맥아더는 ‘US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와 인터뷰에서 만주 국경지대의 공산군을 폭격할 수 없어 UN군은 군의 역사상 전례가 없이 엄청난 핸디캡을 받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직격이었다. 이 때도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했어야 했다고 회고록에서 술회했다.

맥아더의 ‘언론 플레이’가 계속되자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트루먼이 선택한 카드가 ‘언론 금족령’이었으나 맥아더는 개의치 않았다.

1951년 1월 29일 영국 ‘텔레크라프’와의 인터뷰에서 “아시아의 자유를 위한 전투는 계속될 것”이라고 발언해 당시 휴전을 모색하고 있던 트루먼 정부를 당혹스럽게 했다.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섬에서 만난 트루먼과 맥아더




● 트루먼과 맥아더, 웨이크섬 신경전 
중공군이 참전하기 직전인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섬에서 열린 트루먼과 맥아더의 회담은 ‘맥아더의 중공군 불참 오판 발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중공군이 참전할 가능성이 적고 참전해도 소수에 그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회담은 ‘맥아더가 늦게 도착해 트루먼 대통령을 기다리게 했다’는 가짜뉴스까지 나올 정도로 두 사람의 기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먼저 회담 장소. 당초 호놀룰루가 지목됐으나 맥아더가 ‘전쟁 중 오래 도쿄 본부를 비우는 것이 곤란하다’고 주장해 워싱턴에서는 1만2000km, 도쿄에서는 4800km 떨어진 웨이크섬으로 결정됐다. 백악관 실무자들이 ‘국왕이 왕자를 만나러 가는 법이 어디있냐’고 반대하기도 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외국의 군주처럼 행세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며 불참했다.(핼버스탬, 555쪽)

그럼에도 트루먼이 맥아더를 만나러 간 이유는 뭘까. “(재선까지 대통령 임기 6년째인데) 한 번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깐 (워싱턴에) 다녀가라 해도 오지 않아 유감이었다.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 위협에 대한 소식도 궁금했다.”(트루먼, 339쪽)

사령관에게 전쟁 현황을 들으려는 것도 있지만 트루먼이 한 달도 안 남은 중간선거에 ‘전쟁 영웅 맥아더’의 후광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맥아더도 “회담이 무슨 목적으로 열렸는지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중간선거가 다가오고 있어 대통령은 회담 목적이 자기 정당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결부시키는 데 있었던 것 같다”며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고 보았다.(맥아더, 216쪽)

트루먼은 중공군에 대한 맥아더의 견해를 듣는 것이 회담의 주요 관심사였다고 강조했지만 맥아더는 회담이 끝날 때쯤 잠깐 언급했다고 했다. 트루먼은 맥아더가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을 예견하지 못했음을 부각하려 한 반면 맥아더는 주요 화두가 아니었음을 강조한 회고록에서도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 대통령에 경례하지 않은 맥아더   
맥아더가 자신이 탄 비행기를 연착시켜 대통령이 기다리게 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하와이를 거쳐온 트루먼의 전용기 인디펜던스호는 오는 도중 예정보다 빨리 도착하지 않기 위해 조종사가 일부러 비행속도를 늦추었다.(트루먼, 340쪽)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과 만나면서 경례를 하지 않은 것이 모두의 눈에 띄었다. 덜레스 국무부 고문이 회담 후 무례함을 들어 교체를 건의했지만 트루먼은 “맥아더를 영웅으로 만든 미국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오지 않고는 해임할 수 없다”고 했다.

트루먼은 오전에 회담을 마치고 점심을 같이 하고 싶어했지만 맥아더가 도쿄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했다. 맥아더는 시차 때문에 점심을 하고 가면 한밤중에나 도쿄에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트루먼은 퇴임 수년 후 고향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버넌 월터스로부터 웨이크섬에서 맥아더가 경례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마음이 불편했다. 결국 그를 해임했는데 실은 훨씬 전에 해야 했다. 그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이해하질 못했다”고 털어놨다.

회담에 워싱턴에서는 35명의 기자와 카메라맨이 3대의 비행기에 나눠타고 와서 트루먼을 동행 취재했다. 반면 도쿄 사령부를 출입하는 ‘근위대’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기자들은 가지 못했다. 맥아더는 전용기에 여유가 있었지만 국방부가 허락하지 않아 기자단 동행없이 섬으로 왔다.

웨이크섬 회담은 메모없이 구두로만 진행됐다. 그런데 회담에서 필립 제섭 대사의 여비서가 누가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옆방에서 회담 내용을 속기한 것이 맥아더 청문회 과정에서 불거졌다. 맥아더가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을 증명하는 자료여서 맥아더가 항의하는 등 논란거리가 됐다.


● 트루먼과 맥아더, 상호불신과 불화 
트루먼은 맥아더를 군인으로서 존중 존경하지만 “프리마돈나처럼 구는 5성 장군과 도대체 뭘 하란 말인지”라고 자신의 일기에 적은 것처럼 본능적으로 꺼리고 불신했다.

공화당 대선 예비선거에도 출마했던 맥아더는 민주당 소속으로 자신이 싫어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뒤를 이은 트루먼을 좋아하지 않았다. 루즈벨트는 뉴딜정책에 반대하는 등의 이유로 맥아더를 육군참모총장에서 내쫓고 대장에서 소장으로 강등시켰다.

맥아더는 5성의 육군 원수로서 ‘주방위군 대위 출신에 업적도 정치적 능력도 보잘 것 없는 인물이 어떻게 내 위에 있을 수 있나’라며 대통령과 자신을 지휘 계통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한다.(핼버스탬, 191쪽)

웨이크섬 회담에서 만난 트루먼에 대해서는 “겉핧기 지식은 있으나 사실의 배후에 깔려있는 논리나 정확한 원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극동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고 폄하했다.(맥아더, 213쪽)


● 맥아더 청문회 
맥아더 해임은 큰 파장을 일으켜 공화당은 트루먼과 애치슨 탄핵까지 거론하며 청문회를 요구했다. 상원 군사위원회와 외교위원회 합동청문회가 5월 3일부터 6월 말 42일간 진행됐다.

맥아더 본인을 불러 공방을 벌인 청문회는 3일간 진행됐다. 맥아더는 대만 국민당군 이용이나 만주 폭격 등이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자신의 구상은 한국 전쟁에서의 승리가 목적일 뿐 중국과의 전면전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브래들리 합동참모본부 의장은 청문회에서 맥아더의 대중국 태도는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위험을 수반하고 있다며 맥아더의 전략은 ‘미국을 잘못된 전쟁에서 잘못된 시간과 장소에서 잘못된 적에게 몰아넣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루먼 정부는 청문회를 크나큰 승리의 순간으로 기록했다. 오랜 숙적의 발톱을 뽑아버린 것으로 여겼다.(핼버스탬, 954쪽)

하지만 민주당 정권에서 장제스가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에게 내전에 패해 대륙에서 물러났고, 중공군이 개입한 한국전쟁이 3년을 지속하면서 1952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아이젠하워가 당선됐다. 1932년 루즈벨트 집권 이래 20년 만에 정권이 교체됐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맥아더는 미국 1951년 4월 19일 미 상하원 합동회의 고별연설에서 자신의 아시아 중심주의에 대한 철학, 자신이 10개월 가량 지휘했고 아직 진행중이던 6·25 전쟁에 대한 소신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전했다. 그의 중국에 대한 진단은 ‘전랑(戰狼)외교’라는 말까지 듣는 현재의 중국에도 해당될 듯한 내용이 적지 않다. 다음은 연설요지


● 아시아
흔히 아시아는 유럽으로 향하는 입구라고 말하지만 유럽이 아시아로 향하는 입구라는 것도 사실이다. 아시아나 유럽이나 어느 한쪽이 가지는 방대한 영향은 반드시 상대방에게도 끼치게 마련이다.
미국의 힘이 아시아와 유럽을 동시에 보호하기에 불충분해 우리의 노력을 분산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보다 더 심한 패배주의를 생각할 수 없다. 우리의 적이 힘을 쪼개 아시아와 유럽을 동시에 공격하면 우리도 동시에 적에 반격하는 도리밖에 없다.



● 대만의 중요성
태평양 전쟁을 겪으면서 태평양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게 됐다. 어떤 환경에서도 대만이 공산주의자의 수중에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도 그 이유다. 대만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당장 필리핀의 자유와 일본의 상실을 가져온다. 우리의 서쪽 경계선이 캘리포니아주, 오리건주 워싱턴주 해안까지 후퇴하게 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 공산 중국에 대한 인식 
공산 정권 아래 통일된 중국의 민족주의는 점차 침략적인 경향을 증대시키고 있다. 지난 50년 동안 중국인들은 자신의 이상과 개념에 입각한 군국주의를 발전시켜왔다. 중공은 아시아의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했다. 소련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으나 그 방법과 개념에서는 점차 침략적인 제국주의 경향을 띠고 있다. 제국주의의 본질인 영토 및 세력 확장을 위한 야욕을 지니게 되었다. 중공 정권에 이데올로기적 요소는 적은 것 같다.


● 6·25 제한전에 대한 불만 
나는 증원부대를 요청했으나 보낼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압록강 북쪽 적의 보급 기지를 파괴하도록 허가하지 않는다면 대만의 약 60만 명 병력을 한국전에 투입하자고 했다. 그것이 곤란하면 중국 해안을 봉쇄하여 외부로부터 원조를 받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문제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는 것이 사령관으로서의 나의 견해임을 밝혔다. 결과는 나의 입장을 왜곡하고 나를 전쟁 도발자라고 비난했다. 이는 진실과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지휘함 마운트 매킨리 함에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 한국인의 용기와 신념 
한국의 비극은 군사행동이 제한되어 있어 더욱 비참해지고 있다. 세계 모든 나라 중 사력을 다해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한국민의 용기와 확고부동한 신념은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들은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전한 최후의 말은 태평양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의 맥아더 장군 흉상. 인천 = 구자룡 기자




● ‘노병은 죽지 않는다’

이제 52년 군인 생활을 마치려 한다. 내가 입대한 것은 20세기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내가 웨스트포인트 광장에서 선서를 마친 이래 세계에는 많은 변동이 일어났다. 나의 희망과 꿈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나는 초년 장교시절 군대에서 유행하던 노래의 후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이 노래의 노병처럼 이제 군대 생활을 끝내고 하느님의 계시에 따라 자기의 임무를 완수하려고 노력하여 온 한 사람의 노병으로서 사라져간다.



“트루먼 씨, 나의 해임은 부당하다” 한국 정부 부처인 문화공보부가 발행하는 잡지 ‘정보’ 8호(1956년 8월)는 맥아더 장군이 자신의 해임에 대해 트루먼에게 조목조목 반격하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 잡지는 원문의 출처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다. 미국 정치의 ‘문민 우위’의 원칙에 따라 대통령이 군 사령관을 해임한 것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퇴임 후 글로써 격렬히 반박했다. 자신의 해임 배경에 대해 트루먼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설명한 것을 두고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반박했다. 호칭은 ‘트루먼 씨’였다.


● 반박 글을 쓰게 된 동기 
트루먼 씨의 사실 왜곡이 너무나 지나쳐 진실한 수정보고를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도리어 국가에 대하여 충성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국민에 대하여서도 해를 끼치는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황달증에 걸린 환자의 눈에는 모든 것이 황색으로 보인다는 옛말은 트루먼 씨의 과오의 원인을 설명하는 좋은 말이다. 이 어구는 특히 악의 또는 원한과 복수심에서 나오는 비천한 본능작용을 초월하지 못하고 빈번히 과격화하고 저속한 대중 언쟁을 일삼아 오던 트루먼 씨의 경우에 적합한 말이라고 하겠다.


● 트루먼의 ‘제한전’ 비판 
트루먼 씨의 정책 변경은 약속된 범위 이상으로 전쟁을 확대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오랜 휴전회담 기간 받은 아군의 손상보다 훨씬 적은 손해로 완전한 승리를 획득할 수 있었던 아군의 행동을 고의적으로 묶었다. 국제연합군 사상자의 약 5분의 3은 내가 해임된 뒤 발생했다.
트루먼 씨의 작전은 수비 위주이다. 이는 전쟁에서 수비보다 공격을 위주로 해야 한다는 미국의 한세기 반 이래의 군사적 교의에 역행하는 기괴한 작전이다. 전쟁은 이기지 못해도 승리한 것과 마찬가지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기이한 이론도 폈다.


● 해임 절차상의 문제 
트루먼 씨는 나를 해임하는데 수년간 있었던 일을 열거하고 있다. 내가 그에게 불복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관 명령 불복종은 군인으로서는 가장 중대한 범죄다. 그러한 불명예스러운 비난을 받는 군인은 예외없이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고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법에도 설명과 청문을 요구할 권리가 규정되어 있다. 나에게는 전혀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하등의 법적 호소를 제기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대통령직을 떠나고 나도 일개 시민이 되었을 때 회고록을 통해 나의 해임사유가 명령 불복종에 의한 것이라고 뒤늦게 말했다.


● 부당한 해임 사유 
트루먼 씨는 나의 해임 이유를 조사한 상원합동조사위원회에 참석한 합동참모본부 간부들이 맹세코 나의 해임이유가 명령불복종이 아니라고 한 점을 은폐하려고 한다. 자신에 대한 비난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다. 트루먼 씨는 브래틀리 합참의장이 명령불복종의 죄를 비난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브래틀리는 세 명 의원의 질문에 세 번 거듭해 ‘맥아더가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한 일은 전혀없다’고 대답했다.


● 맥아더 회고록에서 반격
맥아더는 자신이 무언가 비열한 방법으로 공화당과 공모하고 있었다고 트루먼이 믿었다며 자신의 해임은 극히 정략적이라고 회고록에서 주장했다. 그는 대통령의 뜻과 맞지 않은 사례로 링컨과 그랜트 장군의 사례를 들며 “링컨의 침착한 위엄과 자제력을 갖춘 태도와는 얼마나 차이가 클까”라고 꼬집었다.(맥아더, 260쪽)
그는 자신이 해임 몇 년 후 상관에 복종하지 않았다며 비난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나만큼 철저하게 복종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무엇보다 문관우위는 미국 정치의 기본 요소지만 자신처럼 갑작스런 방법으로 해임된 예는 없다고 주장했다. “나는 해임에 앞서 청문회도, 변명할 기회도 부여되지 않았으며 과거의 경력에 대한 것도 고려되지 않았다”. 그는 지휘권 이양에 따른 예의를 지키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며 “사무실의 사환, 청소부, 하급직원도 이처럼 해고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맥아더, 265쪽)



<참고문헌>김계동 지음,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명인문화사, 2014.
더글러스 맥아더 지음, 『맥아더 회고록』, 2권, 일신서적, 1993.
딘 애치슨, 『Present at the Creation』, Norton & Company Inc., 1969.
해리 S. 트루먼 지음, 손세일 옮김, 『시련과 희망의 세월-트루먼 회고록』 하, 1968.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