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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은 내게 배움을 주는 존재” 청년작가 이슬아의 세상과 우정 맺기[정양환의 요즘 (젊은) 것들]

입력 | 2023-02-26 09:00:00

[1]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청년’ 이슬아 작가(하)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떠올려보면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이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이니까요.

※상편(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3480149?sid=103)에서 계속

“순덕 님은 ‘사는 게 너무 고달팠어요’라고 말한 뒤 ‘그래서 더 힘든 사람을 생각했어요’라고 덧붙였다. 나는 이 두 문장이 나란히 이어지는 게 기적처럼 느껴진다.” (이슬아의 ‘새 마음으로’에서)

“식사는 하셨어요? 커피 향이 몰려오니 괜히 허기지지 않나요.”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이슬아 작가(31)를 만나고선, 속으로 두 번 적잖이 놀랬다. 그간 공개된 프로필 사진들을 보면 대체로 무표정해 다소 도도할 거란 인상을 받았다. 근데 막상 마주한 뒤엔 이리도 편안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이란 걸 알게 된다.

두 번째는 마음 쓰는 방식이었다. 지난해 첫 소설 ‘가녀장의 시대’는 작금의 청년 정서를 옴팡지게 담아냈단 평. 특히 가부장제나 남성중심사회를 유머러스하면서도 대차게 꼬집었다. 하지만 실제 만나본 작가는 이를 결코 ‘투쟁’의 영역으로 풀려 하지 않았다. 분명 문제점은 개선하고 나아가되, ‘우정’이란 이름 아래 소통으로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러 사회갈등세력이 선긋기에 골몰하는 시대에, 그의 우정론은 두고두고 곱씹을 만했다.

이슬아의 소설 ‘가녀장의 시대’엔 반려묘 자매 숙희와 남희가 등장한다. 실제로 인터뷰 내내 낯선 손님을 성가셔하는 고양이들의 울음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그들의 안식을 잠시나마 방해한 점,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작가 이전에 다양한 경험을 많이 쌓았더군요.

“별의별 알바를 다했죠. 결과적으로 글쓰기에 도움이 됐지만, 당시엔 생계를 위해서였어요. 대학 때 학비는 대출 받았지만, 월세나 생활비는 직접 벌어야했거든요. 수업 들으며 알바 뛰면 그걸로 일주일이 쉴 틈 없이 다 가버리죠. 누드모델을 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어요. 시간 대비 고소득이니까요. 그때로선 합리적인 선택이었기에 지금도 혼란스럽거나 부끄럽지 않아요.” (※이 작가는 2011년부터 3년 동안 한국누드모델협회에 소속돼 정식 모델로 활동했다.)

-어머니가 모델 때 입을 좋은 가운을 사주시는 대목이 책에 나옵니다.

“부모님은 언제나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셨어요. 누드모델도 ‘자신의 선택’으로 받아들여 주신 거죠. 부모님은 열심히 사셨지만 집안 형편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열아홉부터 손 벌리지 않고 직접 벌었습니다. 물론 전세금 생활비 걱정 안 하는 친구들이 부럽긴 했죠. 하지만 사회구조 자체가 노력해도 한계가 있는 건데, 부모님을 원망하진 않았습니다. 직접 돈을 벌며 누리는 자유도 있거든요. 스스로 꾸려나가니까 선택도 제가 하고 책임도 제가 지는 거죠. 다시 떠올려보면 버티는 쪽에 가까웠지만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부모님께는 아니어도 세상에 대한 원망이 생길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음…, 그땐 그리 깊이 생각할 틈이 없었던 거 같아요. 오히려 요즘에 더 세상살이에 대해 고민하죠. 사회에 ‘경제적 계급’이 존재한다는 걸 많이 느낍니다. 기후위기든 젠더갈등이든 모든 문제가 사회적 경제적 구조를 고민하지 않고서는 풀어내기 힘들다고 봐요. 친구들과 대화할 때도 먼저 정치나 법 등 제도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요즘 젊은 세대는 정치나 사회에 무관심하다고들 하잖아요.

“제가 젊은 층을 대변할 순 없지만, 그런 말엔 동의하지 않아요. 주변을 보면 선거도 열심히 참여하고 정치 사회 문제에 적극 의견을 개진하는 청년들이 많거든요. 물론 이 역시 일반화해서는 안 되겠지만, 청년들이 세상에 관심 없다는 선입견은 잘못됐다고 봐요. 단지 기성세대보다 목소리를 낼 기회가 덜 주어지는 게 아닐까요.”

이슬아 작가의 인터뷰집 ‘새 마음으로’(2021년). 평범하지만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살아온 어른들을 만나는 이 책은, 개인적으로 최근 몇 년 사이 읽었던 대화집 가운데 최고였다. 교보문고 홈페이지  



-그간의 작품들도 그런 의식이 잘 묻어났어요. 자전적 색채가 강한 첫 소설 ‘가녀장의 시대’ 역시 그렇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나의 얘기’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소재라고 생각했거든요. 처음부터 전혀 익숙지 않은 캐릭터를 새로 창조할 필요성을 못 느꼈죠. 물론 ‘가녀장의 시대’는 소설이라, 책에 등장하는 슬아나 복희 웅이(부모님 실명) 등은 실제 인물과 이런 저런 차이점이 많죠. 부모님이 불편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흔쾌히 받아주셨어요.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지만 ‘심리적 유복함’은 넘쳐났거든요. 언제나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항상 비빌 언덕이 돼 주셨습니다.”

-소설은 형식도 독특했어요. 기승전결이 딱히 없고, 여러 짤막한 에피소드가 이어집니다.

“처음부터 시트콤 형식을 염두에 두고 썼어요. ‘순풍산부인과’처럼 각 에피소드에서 얘기가 마무리되는 문법을 따랐어요. 아마 올해 ‘가녀장의 시대’가 드라마화 될 텐데, 처음부터 구상했던 거였어요. 방송국이랑 마무리 조율 중인데, 각본 작업에도 참여할 예정이라 이래저래 바쁠 것 같습니다.”

-2021년 출간한 대화집 ‘새 마음으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청년 작가가 60대 이상인 보통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게 신선했어요.

“작가로 살아가면서, 우리 주변의 많은 중요한 사실들이 의외로 덜 알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해요. 평생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노동에 오랫동안 헌신한 분들도 그렇죠. 병원응급실 청소 노동자라든가 수선가게 사장님, 농업인 등등.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를 겪으며 그걸 더 뼈저리게 느꼈어요. 난 농사짓는 법도 모르는데, 지금 내 앞에 차려진 밥상의 음식 재료들은 누구 덕에 여기까지 온 걸까. 그런 분들의 얘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게 큰 의미가 있다고 여겼어요.”

-대부분 할아버지 할머니뻘이셨는데 대화하기 어렵진 않았나요.

“어릴 때 조부모 밑에서 자라서 그 세대 어른들과 얘기 나누는 게 두렵진 않았어요. 세상에 무척 중요한 노동을 꾸준히 해 오신 분들이라, 내용도 남달랐고요. 근데 ‘새 마음으로’는 제가 낸 책 가운데 가장 덜 팔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호응이 커서 놀랐어요. 유명하신 분은 하나도 없어서 관심 없을 줄 알았거든요. 역시 사람들은 소중한 얘기를 알아보는 힘을 갖고 있구나, 이 분들과 닮은 어른들이 우리 모두의 주변에 있기에 공감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와 대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까.

“글쓰기 수업할 때 아이들에게 꼭 내는 과제가 있어요. 자기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인터뷰해보라고 하죠. 윗세대의 생애를 알면 자연스레 우리 근현대사도 배우는 거잖아요. 그걸 온전히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하나의 문을 열고 발을 내딛는 거죠. 물론 당연히 대화하기 싫은 어른들도 존재하죠. 그런데 말하기 싫은 또래 역시 있잖아요. 어쩌면 세대갈등은 사회가 만들어낸 ‘가상의 틀’이 아닐까요. 서로 소통하려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채, 그냥 저들은 저렇다며 단정 지어 버리는 거죠.”

이슬아 작가는 “글을 읽는다는 건 다른 사람의 이야기엔 무엇이 들어있을까 들여다보는 마음 같은 것”이라고 했다. 요즘 우리는 서로에게 귀기울이려는 ‘마음의 공간’을 넉넉하게 지니고 있을까.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다른 사회적 갈등도 마찬가지라 여기는 건가요.

“네. 원인이 뭔지 어떻게 풀어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무슨 무슨 갈등이라 말하는 자체가 그걸 더 양산하고 조장한다고 봅니다. 그런 갈등론이 유효한 구석도 있겠죠. 하지만 대체로는 그런 시각을 가진 이들의 욕망이 투영된 결과물 아닐까요. 예를 들어, 최근 젠더갈등 논란이 많은데 필요 이상으로 논쟁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어요. 젠더(성) 자체가 문제는 아니잖아요. 좀더 생산적인 논의가 주목받으면 좋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나와 다른 생각이나 입장을 가진 이들과 어떻게 ‘우정’을 나눌 수 있는지가 중요하겠죠.”

-‘우정’이란 표현이 신선하네요. 서로를 부정하는 극단주의는 안 된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맞아요. 타인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하면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아요. 세상은 복잡하고,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는 간단하지 않잖아요. 제 경우를 말씀드리면,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가부장적인 태도가 무척 싫었어요. 하지만 그분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정서적 유산도 무시할 수 없죠. 그걸 무 자르듯 나눠서 얘기할 순 없지 않나요. 다소 예의 없어 보이지만, 할아버지와 우정을 맺는다는 건 관계를 끊지 않고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 데서 출발하는 거죠. 누구와도 대화를 이어가며 서로 공감을 찾으려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모바일이 세상을 지배하고 코로나19까지 겪으며, 각자 자기 삶에만 관심 갖는 세상이 됐다고들 합니다.

“그게 가장 슬픈 대목이에요. 최근에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과거엔 정보라는 게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으로 구분됐대요. 하지만 인터넷 시대가 온 뒤 내가 아는 정보와 아직 검색 안 했을 뿐인 정보로 나눠진다고 합니다. 이런 시각은 결국 남의 지식이나 의견을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낳아요. 타인은 우리에게 배움을 주는 존재여야 하는데, 그런 접점이 점점 희미해지는 거죠. 정신 차리고 집중하지 않으면, 그저 자기가 ‘알고 싶은 것만 알게 되는 세상’이잖아요. 유튜브 알고리즘이 대표적인 사례죠. 그런 의미에서 책은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녔다고 봅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다는 건 누군가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관계 맺기의 한 가지 방식이니까요.”

-그런 시대에 책을 쓰는 이슬아는 어떤 작가로 남을까요.

“음…, 어려운 질문이네요. 일단 장수하는 작가? 하하. 오래 살고 싶어요. 그래야 오래 쓸 수 있으니까. 운동 열심히 하는 이유도 긴 호흡으로 길게 쓰고 싶기 때문이죠. 박경리 박완서 선생님이나 프랑스 소설가 아니 에르노(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처럼 할머니가 돼서도 왕성하게 글 쓰고 싶거든요. 그 속에서 독자에게 얘기를 건네고 저 역시 그들 말에 귀 기울이는 작가이길 바랍니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서평이든. 장르를 가리지 않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로서. 아, 시만 빼고요. 이슬아의 가슴 속에 시인은 살지 않거든요.”

서울 성북구 정릉동 ‘헤엄출판사’ 2층에 있는 이슬아 작가의 집필실. 빼곡한 책들과 널찍한 책상, 레트로한 조명만 있는 담박한 모양새가 산듯한 온기를 자아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소설 ‘가녀장의 시대’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폴 발레리가 그랬대요. …작품을 완성할 수는 없대요. 단지 어느 시점에서 포기하는 것뿐이래요.” 어쩌면 삶도 그렇지 않을까. 어떤 지위나 부를 얻는다고 결승선에 다다르는 게 아니다. 인생의 종착역은 그저 시간이 정해줄 뿐. 하지만 여기서 포기는 체념이 아닐 것만 같다. 욕심 비우기. 노력은 하되 스스로 만족할 지점을 찾아가는 게 아닐까.

이슬아 작가에게선 분명 그런 여백이 내비쳤다. ‘일간 이슬아’에 운을 다 썼노라 웃었지만, 실은 성급하게 굴지 않는 걸음걸이가 단단했다. 그저 자신의 길에 힘껏 쏟아 부을 줄 아는 글쟁이. 완성이란 결과보다 그걸 찾아가는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청년. 겨울 짙은 정릉동 골목길을 내려오며, 조만간 봄볕처럼 다가올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려본다.

[나의 옛날 이야기] ‘요즘 (젊은) 것들’은  연재 글마다 청년들이 직접 고른 옛 사진들을 싣고자 합니다.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며 그 시절을 들춰보는 ‘코너 속의 코너’입니다. 이슬아 작가의 두 번째 사진은, 유치원 시절 운동회 때입니다. 앙증맞지만 야무지게 달려나가는 미소가 왠지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떠올리게 하지 않나요. 이슬아 작가 제공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