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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색’…단청에 쓰인, 연잎처럼 짙은 녹색을 되찾았다

입력 | 2022-09-08 13:35:00


  연잎처럼 짙은 녹색을 띠어 하엽(荷葉·연꽃의 잎)이라 불렸다. 경북 경주 불국사 대웅전, 충남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논산 쌍계사 대웅전 등 고건물의 단청을 칠하는 데 쓰였던 전통 무기안료 ‘동록(銅綠·동 기물로 만든 녹색 안료)’은 19세기 말 근대로 접어들면서 잃어버린 색이 되고 말았다. 화학 안료 시장이 커지면서 값비싸고 오랜 공정 과정을 거치는 전통 안료는 제법 전수의 맥이 끊겨버린 탓이다. 동록은 한·중·일 전통 안료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일본과 중국조차 복원하지 못한 ‘미지의 색’으로 남았다. 

7일 오후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원 복원기술연구실에서 이선명 학예연구사가 최근 복원한 전통 무기안료 \'동록\'을 들여다보고 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그렇게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우리의 전통 색 동록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이 복원해냈다. 2019년부터 한·중·일 고문헌을 토대로 동록의 제법을 찾아내 전통 안료 강국인 일본과 중국보다 먼저 동록의 수수께끼를 푼 것. 7일 오후 1시경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원 복원기술연구실에서 만난 이선명 학예연구사(40)는 “한·중·일 고문헌에 단 두 줄로 설명된 동록의 제법을 알아내기까지 4년의 시간이 걸렸다”며 웃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동록 제법은 659년 당나라 의학서인 ‘신수본초(新修本草)’에 나오는 “동 분말과 광명염(光明鹽·염화나트륨), 뇨사(硇砂·염화암모늄) 등을 이용해 제조한다”는 기록이 대표적이다. 옛 선조들은 녹슬어 부식된 동 기물의 표면이 녹색을 띤다는 데서 착안해 동 부식 재료로 녹색 안료를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문헌 속에는 재료에 대한 힌트만 나와 있을 뿐 정확한 성분 비율이 전해지지 않아 제조 비법은 미궁 속에 있었다. 

2014년부터 전통 안료 복원 프로젝트를 함께 하고 있는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 복원기술연구실 직원들의 모습. 현재까지 동록을 포함해 총 8가지의 전통 안료 복원에 성공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강영석 연구원(44)은 “수수께끼를 풀듯 원료인 구리와 부식제인 염화나트륨과 염화암모늄의 비율을 조금씩 조정하며 수백 번이 넘는 실험 과정을 거쳤다”며 “2년간의 실험 끝에 동 분말과 부식제의 비율이 1대 2일 때 가장 효율적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실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부식물로 얻어진 동록을 갈아 쓰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나무 표면에 채색해 보니 고르게 발리지 않았다. 게다가 빛에 노출될 경우 3년 안에 녹색이 어둡게 변색될 거라는 예측 결과도 나왔다.

 “‘아, 이제 됐다’고 끝내려는데 또 다시 난관에 봉착한 거예요. 알고 보니 부식물 속에 남아 있는 부식제인 염 성분 때문에 변색된 거였죠. 부식물에서 염 성분을 완전히 제거하기까지 6개월이 더 걸렸습니다. 그때 깨달았어요. 전통을 복원하는 일에는 끝이 없다는 걸.” (강 연구원)

아래쪽 절반은 전통 안료로, 위쪽 절반은 화학 안료로 덧칠한 전통 문양. 이선명 국립문화재연구원 학예연구사는 "화학 안료로 칠해진 윗면보다 전통 안료로 칠한 하단의 색감과 질감이 입체적으로 느껴진다"고 설명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동록을 복원하기까지 2년이면 충분할 거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무려 4년이 걸렸다. 하지만 어렵사리 얻어낸 동록의 빛깔은 화학 안료와는 확연히 달랐다. 이 학예연구사는 “천연안료로 색칠한 표면은 알갱이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듯 입체적으로 느껴지는 반면 화학 안료가 칠해진 표면은 평면적”이라며 “이게 바로 전통 안료를 복원해야 하는 이유다. 아직까지는 문화재 복원에 화학 안료가 많이 쓰이지만 앞으로 전통 안료를 계속 복원해낸다면 자라나는 아이들은 전통의 색이 뿜어내는 입체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
 
  4년이라는 시행착오를 거쳐 동록이 복원된 덕분에 옛 단청을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복원할 길이 열렸다. 국립문화재연구원이 2017년부터 2020년까지 경주 불국사, 공주 마곡사 등 전통고건축문화재 44곳에서 녹색 안료로 칠해진 668곳의 성분 분석을 실시한 결과 전체 녹색 안료 가운데 39.8%(266곳)에 동록이 쓰인 것으로 확인됐다. 공작석(孔雀石)을 갈아 만든 천연 녹색 안료 ‘석록(石彩)’이나 ‘뇌록(磊綠)’보다도 동록의 사용 비중이 더 높은 셈이다. 

7일 오후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원 복원기술연구실에서 강영석 연구원이 백색 안료를 제조하고 있다. 강 연구원은 "같은 백색이라도 재료에 따라 질감과 지속력, 색감이 천차만별"이라며 "앞으로 백색 안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국립문화재연구원의 실험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앞으로 단청을 칠하는 장인에게 재료의 특성을 전수해 전통 안료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일까지 이들의 몫이다. 더 나아가 동록을 포함한 천연 안료의 제법을 국유 특허로 내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원은 2014년부터 현재까지 동록, 뇌록을 비롯해 총 8가지 전통 안료를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민간 기업에 천연 안료 제법 기술을 이전하면 국립문화재연구원이 직접 개발한 전통 안료를 중국과 일본에 수출할 길이 열린다.

 “우리는 시간을 거스르는 자들입니다. 하나의 전통 안료가 복원되고 이 세상에 쓰이기까지 10년,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지 몰라요. 세상에 빠르고 값싸고 편리한 것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는 100년 넘게 단절된 전통을 복원하는 일을 합니다. 구닥다리 같아 보여도 국가지정문화재를 보존할 때만큼은 원칙을 지켜야죠.” (이 학예연구사)
이소연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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