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기습 공격했다. 이것이 바르바로사 작전이다. 초기에 독일군의 기세는 무서웠다. 북부, 중부, 남부 3개 집단군으로 구성된 독일군은 각각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우크라이나를 향해 진격했다. 7월 16일 중부집단군의 선봉이던 전격전의 아버지 구데리안 휘하의 29보병사단이 스몰렌스크를 점령했다.
스몰렌스크는 폴란드에서 벨라루스를 지나 모스크바로 향하는 직선상에 있다. 7월 중순 동안 구데리안은 소련군의 역습을 격퇴하며 스몰렌스크를 확고하게 장악했다.
그는 바로 모스크바로 진격하고 싶었지만 히틀러가 남쪽으로 방향을 전환해 우크라이나로 향하라고 지시했다. 히틀러도 이유는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전략적으로 제일 중요한 지역이었다. 곡물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러시아가 장악한 도네츠 지역은 당시 소련 전체의 석탄 60%, 코크스 75%, 철 30%, 강철 20%를 생산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로 향한 남부집단군의 전과가 제일 부실했다.
종전까지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과 소련이 일진일퇴 공방전을 펼친다. 소련군도 유대인에게 가혹했고, 우크라이나인은 동족이 아니었다. 소련군이 진군하면 민족주의자를 살해했고, 물러가면 공산주의자가 보복을 당했다. 국가, 이념, 민족, 우리가 6·25전쟁에서 겪었던 것과 같은 비극이 1940년대 우크라이나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약 80년 후에 비극이 재연되고 있다. 로마사에 새겨진 격언이 있다. “가련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약자이니라.”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