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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 아이 푸틴이 쥐끓는 아파트에서 배운 것은…[김수현의 세계 한 조각]

입력 | 2022-04-12 11:30:00


총선을 하루 앞둔 4월 2일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얼굴에 붉은 손바닥 자국을 찍은 그림 팻말을 들고 선 반전(反戰) 시위자. 그림 밑에 ‘살인자(killer)’라는 문구와 우크라이나 국기를 상징하는 ‘파랑-노랑’ 리본이 보인다.




“스탈린 전체주의 사상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훼손했습니다. 이제 러시아는 민주주의 사회와 시장경제 건설을 시작하는 첫 단계에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말조차도 감히 사용할 수 없는 러시아에서 과연 누가 이런 용감무쌍한 발언을 했을까요? 다들 놀라지 마세요.

2001년 독일 베를린 연방의회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유창한 독일어로 연설하고 있다.




바로 21년 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입니다.


소설 ‘지킬 앤 하이드’처럼 푸틴 대통령에게는 두 가지 버전의 푸틴이 있다고 합니다. ‘합리주의자 푸틴’과 ‘미치광이 블라드(블라디미르의 줄임말)’. 서방 러시아 전문가들은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름반도 무력 강제 병합을 계기로 ‘미치광이’가 전면에 나섰다고 분석합니다. 오늘은 그 이전, 푸틴이 러시아 권력을 장악한 첫 10년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약한 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

1958년 7월 옛 소련 지역에서 푸틴(6세)과 어머니 마리아. 오른쪽 사진은 청소년기 푸틴.




올해 70세인 푸틴은 1952년 옛 소련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1년~1944년 나치 독일은 레닌그라드를 872일 간 완전 봉쇄하고 공격했습니다. 역사상 최악의 포위작전으로 꼽히는 이 레닌그라드 공방전으로 당시 적어도 레닌그라드 시민 100만 명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숨졌습니다.


푸틴은 참혹함이 가시지 않은 이 도시 길거리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소련군으로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싸운 그의 아버지는 한 팔을 잃었습니다. 어머니는 굶주림에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위로 두 형이 있었지만 전쟁 때 숨졌습니다. 쥐가 들끓는 아파트에 살던 그는 동네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이후 불량배들과 어울리며 비행청소년이 됩니다. “약한 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가 길거리에서 배운 교훈입니다.


푸틴은 17세 때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레닌그라드 지부를 찾아 비밀요원이 되는 법을 묻습니다. “법학을 공부하고 국가에 반하는 언동을 하지 말라”는 답변을 듣고는 즉시 실행에 옮깁니다. 정확히 1년 후 그는 국립 레닌그라드대학 법학과에 입학합니다. 1975년 졸업하기 전 이미 KGB ‘러브콜’을 받고 국가에 충성할 것을 맹세합니다.


KGB 제복을 입은 푸틴. 1980년대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1984년 32세인 그는 KGB 옛 동독 드레스덴 지부로 파견됩니다. 중간급 관리였던 그의 구체적인 임무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주로 현지 요원 모집과 준비를 담당했다고 합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도 그는 드레스덴에 있었습니다. 분노한 군중이 KGB 지부를 습격하려 한 날 밤, 러시아 본부에 무장 지원을 요청한 그에게 돌아온 것은 침묵뿐이었습니다.


그는 그날 밤 옛 소련의 붕괴를 직감했습니다. 이후 그는 “가장 강력했던 제국이 누구보다 한심하고 굴욕적으로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고 ‘그 밤’을 회고합니다.


○호모 소비에티쿠스(소련형 인간)

1999년 8월 어느 날. 러시아 하원 두마에 의원들이 모였습니다. 러시아 차기 총리 입후보자를 의회가 승인하는 날이었습니다. 신진 정치인 푸틴은 떨리는 마음으로 후보자 연설을 마쳤습니다. 그러자 한 의원이 외칩니다. “스테파신 후보를 지지합니다!” 그의 이름을 헷갈린 한 의원이 엉뚱한 사람을 지지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름조차 틀릴 정도로 주목받지 못한 총리 후보자, 바로 23년 전 푸틴입니다.


젊은 푸틴은 러시아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포부에 대해 확고했습니다. “러시아는 수세기 동안 강대국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우리에게는 합법적으로 보호해야 할 이해관계가 있다. 우리 의견이 (국제사회에서) 무시당해서는 안 된다.”


2000년 2월 2차 체첸전쟁 당시 러시아군이 시신들을 참호에 집단 매장하고 있다.





그의 야욕은 2차 체첸전쟁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1991년 체첸 자치공화국은 보리스 옐친 당시 옛 소련 대통령의 강력한 탄압에도 분리 독립을 선언합니다. 1996년 러시아군을 물리치고 사실상 독립을 획득했습니다. 그러나 1999년 푸틴 당시 총리가 주도해 러시아군은 체첸을 다시 침공했습니다. 러시아군은 체첸 수도 그로즈니에 무차별 포격을 가해 수많은 민간인을 죽였고, 도시는 90%가 파괴됐습니다. 진공폭탄을 비롯해 비(非)인도주의적인 새로운 대량살상무기 사용에도 푸틴은 괘념치 않았습니다.


이듬해 러시아군은 그로즈니를 점령합니다. 체첸은 러시아 영토에 귀속됩니다. 2009년 푸틴은 허울뿐인 체첸 지역 ‘반(反)테러 작전’을 종결한다고 선언합니다.


○푸틴의 거짓말


KGB 출신인 푸틴을 두고 많은 서방 정치인들은 “사람 속이는 데 매우 능숙한 인물”이라고 평가합니다. 서방 국가와 친구할 준비가 된 것처럼 말하며 뒤통수를 많이 쳤기 때문입니다. 푸틴의 ‘절친’으로 알려진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최근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은 그(푸틴)에 대해 오판했다”고 시인했습니다.


199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절 푸틴.




푸틴의 첫 정치적 행보는 샹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합니다. 1991년 그는 샹트페테르부르크 시장실 대외관계위원장에 임명됩니다. 푸틴은 서방국가에 개방적이었습니다. 도시 경제를 살리기 위한 해외 투자 유치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2000년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과 만나서는 러시아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2002년 양국은 협의 기구 나토-러시아위원회(NCR)를 설치합니다. 물론 나토 가입은 말로 그쳤습니다. 정말 나토 가입을 원했는지는 푸틴만이 알 것입니다.


2001년 푸틴은 친(親)서방 외교를 펼쳐 나갑니다. 푸틴과 처음 조우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그의 영혼을 느꼈다. 푸틴은 매우 올곧고 진실한 인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푸틴은 같은 해 미국에서 9·11테러가 발생하자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해 위로를 전하며 미국의 향후 행동에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겠다고 약속합니다. 푸틴은 이날 부시 대통령과 가장 먼저 통화한 국가지도자였습니다.


2001년 독일 베를린 연방의회에 참석한 푸틴 대통령이 단상 위에 올라가 연설하고 있다. 그의 앞에 앉은 하원의원들이 그의 연설을 경청하고 있다.




무엇보다 서방에 ‘충격적인’ 희망을 심어준 것은 그해 9월 독일 연방회의에서 한 연설이었습니다. “괴테 실러 칸트의 언어로 말하겠다”며 독일의 인문학적 자긍심을 추켜세우며 운을 뗀 푸틴은 유창한 독일어로 연설을 이어갔습니다. “유럽의 안정적 평화는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면서 “민주적 권리와 자유는 러시아 국내 정책의 핵심”이라고 말했습니다. 독일 정치인들의 기립박수가 쏟아졌습니다.


○탈(脫)미국 중심주의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2003년 조지아 ‘장미혁명’, 2004년 발트3국(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나토 및 유럽연합(EU) 가입, 같은 해 우크라이나 ‘오렌지혁명’이 잇달으며 옛 소련에 속하면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구 유럽 국가에서 러시아 입지가 급격히 축소됐습니다.


이때부터 푸틴의 미국에 대한 의심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고 합니다. 이 국가들에서 친러시아 정권을 붕괴시킨 색깔혁명(color revolution)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특히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푸틴은 미국 일극(一極)체제 아래 유엔 헌장과 국제법의 존재 이유를 강하게 회의합니다. 누군가 이 세계를 다스려야 한다면 미국이 아니라 러시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07년 독일 뮌헨에서 열린 국제안보회의에 참석한 푸틴 대통령(오른쪽)이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가운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옆에는 과거 친러 반대 세력에 의해 목숨을 잃을 뻔한 빅토르 유셴코 우크라이나 전 대통령이 보인다.




2007년 독일 뮌헨에서 열린 국제 안보회의에 참석한 푸틴은 작심한 듯 미국을 비판합니다. “미국이 지배하는 일극체제는 모든 의사결정이 하나(미국)를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그는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거의 억제되지 않는 과도한 무력을 사용하고 있다. 이로써 어떤 국가도 국제법으로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됐다”면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을 비난합니다.


‘러시아 패권’을 되찾으려는 푸틴의 행보는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름반도 무력 강제 병합을 계기로 수면 위로 본격 등장합니다. 러시아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서방 국가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유럽 갈등은 심화됩니다. 다음 주 ‘푸틴 VS 유럽’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