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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기인, 그리고 추억[김인현의 바다와 배, 그리고 별]

입력 | 2021-06-04 03:00:00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배를 타고 적도를 지날 때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적도제(赤道祭)’를 지낸다. 이를 위해 10명 이상이 둘러앉을 크고 둥근 상이 필요했다. 목수 직책을 가진 사람에게 상을 만들라고 했더니 “문제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배에 있는 여러 가지 목재를 이용해서 만들면 되니까 나도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연락이 왔다. 낭패라며 목공소에 내려와 보라고 한다. 목공소 안에 들어가니 근사한 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는 울상이 되어 문을 가리켰다. “1항사님, 문이 너무 작아서 이 상을 문 밖으로 꺼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더니 이런 일도 생기나 싶었다. 시간이 급해 일단 톱으로 이등분해서 밖으로 꺼낸 다음 다시 합쳤다. 지금 생각해도 우습기는 하다. 배라는 공간이 좁다 보니까 벌어진 에피소드다.

첫 배에서 만났던 S 씨는 정말이지 목을 너무 많이 돌린다. 이야기를 할 때 10분에 10번 정도는 돌린다. 상대방이 머리를 자꾸 돌리니 나도 어지러워진다. 그 뒤로는 애써 그의 얼굴은 보지 않고 말을 하게 되었다. 사연을 물어보니 고등학교 때 유도를 하다가 목을 다쳤다는 것이다. 알 만했다. 한번은 그 버릇 때문에 큰일 날 뻔했다. 도선사가 승선하고 주위에 배들이 많은 상태에서 항구로 입항을 한다. 모두가 초긴장 상태다. 도선사가 S 씨에게 몇 도 방향으로 향하라고 명령했다. 그 명령은 당직사관인 나를 통해서 전달된다. 반드시 복창해야 한다. 갑자기 복창이 없다. 뭐냐고 하니 S 씨는 그 침로의 도수를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목을 돌리느라고 그만 잊어버린 것이다. 다시 한 번 도수를 불러 사고는 방지할 수 있었다. 휴가를 가는 그에게 병원 치료를 꼭 받으라고 조언했다.

한번은 출항한 지 30일이 넘어가는 긴 항해 중 사건이 벌어졌다. 너무 긴 항해를 하다 보니 사람들이 지치고 예민해져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3등 항해사가 누가 자신을 모욕하는 글을 식당에 붙여 놓았다는 것이다. 같이 내려가 보니 누군가 ‘3항사 개×이다’라는 글을 크게 적어 식당 게시판에 붙여 놓았다. 선내 규율 담당인 나는 누가 그랬는지 범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찾아도 누가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최종적으로 남은 한 사람은 나이가 환갑에 가까운 분이었다. 찾아가서 물었더니 의외로 순순히 자신이 그랬다고 한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왜 그랬냐고 물으니, 3항사와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어떻게 어른이 그런 글을 적을 수 있냐고 한 뒤 두 사람을 화해시켰다.

좁은 선상에서 생활하다 보니 선원들은 가끔 이런 기이한 행동을 한다. 선박이라는 좁고 위험한 공간에 갇힌 무료한 항해 중에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비난할 일도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이미 30년 전 일들인데도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동료들의 얼굴이 또렷하다. 돌이켜보면 순박하고 인간미 넘치는 선원들이 있었던 덕분에 아름다운 추억이 많이 남은 셈이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