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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장택동]이제 김진욱의 강단을 보고 싶다

입력 | 2021-04-21 03:00:00

난제 앞에서 좌고우면하는 공수처장
원칙대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결기 필요




장택동 논설위원

홍콩의 염정공서(ICAC)는 성공적인 반부패 수사기관으로 명성이 높지만 처음부터 꽃길을 걸은 것은 아니다. 홍콩 사회에 부패가 판치던 1974년 염정공서가 설립되자 기득권 세력은 결사 저항했다. 대규모 시위가 열렸고 염정공서 건물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홍콩 반부패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초대 서장 잭 카터는 부패 수사를 멈추라는 압박에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사의 범위를 넓히면서 원칙적으로 대응했고, 성과를 냄으로써 염정공서의 기틀을 다졌다. 훗날 부인이 “남편은 공직을 떠날 생각까지 했다”고 회고했을 정도로 4년의 재임 기간은 순탄하지 않았지만 그는 ‘병든 사회를 치유하겠다’는 신조를 지켰다.

지난해 말 염정공서를 롤 모델로 삼았다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첫 수장으로 지명돼 언론 앞에 선 김진욱 처장은 차분하고 정제된 모습이었다. 수사 경력이 거의 없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원칙주의자’ ‘외유내강형’이라는 세평(世評)은 의미가 있었다.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고 외부의 압박을 견뎌낼 결기가 첫 공수처장에게 필요한 덕목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도 그는 여야 의원들의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는 소신 있는 자세를 보였다. 그가 “여당 편도 아니고 야당 편도 아닌 오로지 국민 편만 들겠다”(취임사)는 교과서적인 발언을 실천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여권의 신뢰를 받는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에 대한 이른바 ‘황제 조사’는 경험 미숙으로 빚어진 일로 넘기기 어렵다. 피의자 신분인 이 지검장을 제대로 조사하거나 아니면 조사 없이 검찰로 재이첩하는 방안 중에 하나를 선택했어야 했다. 그런데 조사는 하되 출석할 때 관용차를 내줘 출입기록이 남지 않도록 배려했고, 조사 장면을 녹화하거나 진술조서를 남기지도 않았다. 예우는 지나쳤고 조사는 한 것도, 안 한 것도 아닌 상황이 돼버렸다.

또 김 처장은 판검사 등의 고위공직자범죄에 대해 수사는 검찰로 이첩하더라도 기소는 공수처가 결정하겠다는 ‘공소권 유보부 이첩’이라는 생소한 개념을 제시했다. 공수처가 수사와 기소를 모두 하든지, 여건이 안 될 경우 모두 검찰로 넘긴다면 법리 공방을 벌이지 않아도 될 일이다. 공수처 검사 인선은 실망의 무게를 더했다. 김 처장과 가까운 인사의 주변 인물들이나 여당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을 검사로 선발해 중립성·공정성 논란을 자초했다.

일단 설립된 이상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공수처는 제 몫을 해야 한다. 카터가 염정공서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듯 신생 조직은 첫 수장의 역할이 안정적 존립의 열쇠가 된다. 그런데 벌써부터 김 처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중견 법조인은 “김 처장이 좌표를 잃은 것 같다. 본인의 신망에 따라 앞으로 공수처가 어떤 위상을 가질지가 달라질 텐데 그 무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보인다”고 아쉬워했다.

여권이 사활을 걸고 만들어낸 공수처의 첫 수장으로서 김 처장이 부담을 느낄 수는 있다. 그렇더라도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듯한 행보는 위태로워 보인다. 김 처장이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도산 안창호 선생은 “튼튼한 뿌리 위에 좋은 꽃과 열매가 있다”고 했다. 공수처의 뿌리를 만들 의무가 김 처장에게 있다. 난제 앞에서 좌고우면하는 모습이 아니라 원칙에 근거해 결정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강단을 보여야 소명을 완수할 수 있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