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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람들에게 오름은 삶의 터전이자 ‘망자의 안식처’

입력 | 2021-03-08 03:00:00

제주의 ‘오름 이야기’ <1> 묘지







한라산과 더불어 제주지역의 대표적인 경관 자원인 오름(작은 화산체)은 주민은 물론이고 관광객에게 탐방 장소로 큰 인기를 끌면서 일부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오름은 야생 동식물의 서식처로 제주 지역 생태계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으며 ‘화산학의 교과서’로 불릴 정도로 화산 분출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오름은 또한 제주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이자 피난처, 기원을 위한 성소이자 놀이공간이기도 했다. 그동안 오름의 형태나 접근 방법 등에 대한 소개가 많았는데 이번 기획 시리즈에서는 오름이 지닌 인문적, 자연생태적인 가치를 새롭게 조명해 본다.

“오름에서 나서 자라고, 오름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입산봉. 분화구는 농경지로 쓰이고 있으며 능선과 사면에는 묘지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1997년 처음으로 공식 조사를 거쳐 제주도가 발표한 ‘제주의 오름’에서 오름의 기준을 한라산 백록담을 제외한 작은 화산체로 정의했다. 화구를 갖고 있으며 내용물이 화산쇄설물로 이뤄지고 화산구의 형태를 지닌다고 봤다. 화산 분출에 따른 분류로는 분석구, 응회환, 응회구, 용암원정구 등이 있으며 외형적인 형태는 원형, 발굽형, 원추형, 복합형 등으로 나뉜다. 당시 전수조사를 통해 오름의 수를 제주시 210개, 서귀포시 158개 등 모두 368개라고 밝혔다. 섬에 300개가 넘는 화산체가 존재하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드문 지리적 특성이다.

오름의 어원은 명확하지 않다. 조선시대 문헌 기록에 따르면 제주에서는 악(岳)이나 봉(峰)을 ‘오로옴’, ‘올음’이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오름을 음차 표기한 것이다. 몽골어로 산을 뜻하는 ‘오르’가 어원이라는 설도 있으며 일부 학자는 ‘오르다’의 명사형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제주 사람들은 오름에서 나고 자라서, 오름으로 돌아간다.”

제주에서는 예부터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제주 곳곳에 있는 오름에 의지해서 생활하다가 결국에는 오름에 묻힌다는 뜻이다. 이를 한눈에 보여주는 곳이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입산봉(해발 85m)이다.

6일 오전 완만한 오르막길에 들어선 지 4, 5분 만에 입산봉 능선에 도달했다. 농사를 짓고 있는 가운데 분화구를 제외하고는 묘(墓)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일제강점기에 묘가 처음 들어선 후 주민들이 하나둘 봉분을 만들었고 지금은 마을공동묘지로 쓰이고 있다. 오름 북쪽 소나무 숲지대, 농경지를 제외하고 3000여 기가 들어섰다. 강정윤 전 김녕이장은 “과거에는 인근 마을에서도 입산봉에 봉분을 썼으나 묏자리가 줄어들면서 김녕리 주민들만 쓰고 있다”고 말했다.

● 풍수지리에 맞춰 오름에 묘지 조성


한라산과 더불어 제주 지역 대표적인 경관자원인 오름(작은 화산체)은 생태계 균형을 잡아 주고 화산 분출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삶의 터전이자 피난처, 기원을 위한 성소이기도 하다.

개인이나 문중을 제외하고 마을이나 행정기관에서 조성한 공동묘지는 입산봉을 비롯해 고내봉, 과오름, 판포오름, 삼매봉, 매오름, 밧돌, 달산봉, 대수산봉, 높은오름 등 28개에 이른다. 묘지는 오름 능선이나 자락에 있다. 제주 현대사의 비극인 4·3사건 희생자를 모신 곳도 제주시 봉개동 거친오름에 있다.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봉은 대정읍공설묘지, 상모리공동묘지, 칠성공동묘지 등 3개 공동묘지와 개인 및 문중 묘지가 조성됐다.

오름에는 ‘망자(亡者)의 안식처’로 인식될 정도로 묘지가 흔하게 보인다.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 남벽 밑 방애오름에서 해안가인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지미봉에 이르기까지 묘지가 들어섰다. 오름에 묘가 우후죽순 생겨난 것은 ‘조상의 음덕을 받으면 후손이 발복(發福)한다’는 풍수지리 때문이다. 1970년대 들어서는 묘지에 따른 농경지 잠식을 막기 위해 마을이나 행정기관에서 공동묘지를 오름에 조성하면서 대규모 묘지로 변했다.

제주 지역에서는 조선 후기 풍수지리를 믿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음택(陰宅) 명당을 찾아서 묘지를 조성하려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육지의 풍수와는 달리 제주 지역은 지맥이나 수맥이 보이지 않은 탓에 곳곳에 솟아오른 오름과의 연결성으로 땅의 기운을 해석했다. 제주 지역 전설적인 명당으로 불리는 ‘6대 음택 명혈’ 가운데 3곳이 오름에 있고, 나머지 3개도 오름 인근에 있다.

풍수전문가인 신영대 제주관광대 교수는 “제주의 오름은 팔방에서 불어오는 살풍(殺風)을 안정시키고 섬 특유의 허한 지세를 보완해주는 비보(裨補) 풍수를 믿는다”며 “한라산에서 나온 땅의 기운이 잘 모이는 오름은 삶의 터전이면서 뼈를 묻는 망자의 고향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 고려 말 오름에 묘지 조성 추정


오름에 묘가 들어선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나온 기록으로 보면 고려 말로 추정된다. 고려 공민왕 때 신돈의 압박을 피해 제주로 귀향 온 광산 김씨 제주 입도조인 김윤조 묘(제주도기념물 제60-1호)는 제주시 구좌읍 묘산봉 자락에 있으며 방묘 형태다. 방묘는 봉문을 석판으로 싸서 각진 형태의 무덤을 말한다.

제주도기념물로 지정된 4개를 방묘를 제외하고는 조선시대 이전 무덤의 실체가 없으며 탐라시대(300∼900년) 왕릉 유물 유적이 발굴된 적도 없다. 고려시대에는 사찰이 많았던 것으로 미뤄 토호와 귀족들은 화장을 선호했고, 양민들은 몽골 지배의 영향을 받아 평장법이나 풍장(風葬) 등을 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제주 지역에서 봉분 형태의 묘는 조선 초기부터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태종실록 13년(1413년), 세종실록 2년(1420년) 등의 기록에 ‘부친상을 당하자 묘소 곁에 여막을 지어 3년 상을 시행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감안한다면 이때부터 묘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제주목사를 지낸 이형상(1653∼1733)이 쓴 ‘남환박물(南宦博物)’에 ‘모두가 3년 상을 지내고 풍수를 따지면서 여러 지역에 묘지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는 점으로 봐서 17세기 후반부터 매장 풍습이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다.

묘를 둘러싼 제주 지역 ‘산담’은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세종실록 12년(1430년), 세종실록 13년(1431년)에 각각 ‘토석을 몸소 지어다가 묘지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석(石)을 봉분을 보호하려고 에워싸는 담장으로 해석해 산담의 시초로 보는 학자가 있다. 제주 안무어사를 지낸 이증(1628∼1686)의 남사일록에 따르면 ‘사방에 주먹만 한 돌들을 둘러쌓아 소와 말이 함부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 밭머리에 묘를 만들고, 돌을 쌓아 담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묘와 함께 산담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 오름 묘지 풍경 변화


산담은 오름에 들어선 묘와 어우러지면서 독특한 경관 자원이 됐다.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용눈이오름의 묘와 산담은 ‘선의 미학’으로 불리는 능선의 매력을 한층 높이는 요소가 된다. 김유정 제주문화연구소장은 “산담은 목장에서 방목하는 소나 말이 묘에 올라서서 훼손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고 불이 났을 때 묘를 보호하기도 한다”며 “한 줄로 된 외담은 살림이 어려운 집이나 어린아이 묘에 쓰이고, 겹담의 튼튼한 산담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묘와 산담, 풍수지리 등으로 형성된 장묘문화는 일제강점기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1912년 ‘묘지·화장·화장장에 관한 취체규칙’이 제정된 후 개인묘지 설치를 허가하지 않고 공동묘지 제도를 도입했다. 제주 지역에서는 1930년대 서귀포시 예래동 군산공동묘지가 처음 지정됐지만 당시 공동묘지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던 탓에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조성됐다. 공동묘지 도입으로 음택 명당을 찾아다녔던 풍수지리가 약화하면서 산담 조성의 필요성도 줄어들었다. 묘가 집이나 밭 주변에 있었을 때는 생활공간으로 여겨졌지만 공동묘지로 조성되자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 분리’ 현상이 나타나면서 두려움, 공포의 장소로 이해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오름에 봉분 묘를 쓰는 일이 드물어졌다. 2019년 화장률이 73.1%에 이를 정도로 화장을 선호하면서 봉분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후손들이 벌초 등 묘지를 관리하기 힘들어지면서 유골을 화장해서 납골당에 안치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오름의 묘지 풍경이 서서히 변하고 있는 것이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