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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가 바뀌지 않는 게 관료 탓만은 아니다[오늘과 내일/홍수용]

입력 | 2021-01-04 03:00:00

백신구매 논란, 적극행정 한계 노출
승진과 勢 확장에 목매는 구조 깨야




홍수용 산업2부장

코로나19 백신 구매가 늦어져 지탄받던 정부가 대통령의 전화 한 통으로 추가 물량을 확보하는 스토리는 시련 끝에 갈등이 해결되는 극적인 드라마를 떠올리게 한다. 해피엔딩에 가까운데도 뒷맛이 개운치 않은 건 드라마 중반부의 의문이 풀리지 않아서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2월 적극적으로 일하는 공무원을 문책하지 않겠다고 했다. 적극행정 운영규정에도 이 약속이 반영됐다. 2020년 7월에는 대통령이 충분한 백신 공급을 강조했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이 정도면 백신을 바로 사도 될 텐데 질병관리청은 2020년 11월에야 정말 면책이 되는지 감사원에 물었고 ‘적극행정위원회’라는 내부회의도 열었다. 대통령은 진작 징계 두려워하지 말고 일하라고 공무원을 독려했다는데 이게 먹히지 않은 셈이다. 이 불일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내막을 알 만한 공무원 A의 설명을 들어봤다. “8절지 노트 100권을 사는 것처럼 확실한 일이라면 금방 했겠지요. 백신 도입은 확실치 않은 물건을 선구매하는 겁니다. 전례가 없는 일이라 감사원에 사전 컨설팅을 의뢰했습니다. 대통령의 면책 언급요? 그런 걸 의식하진 않았어요.”

작년 4, 5월부터 한시도 쉬지 않았다는 A의 말을 나는 믿는다. 제도가 갖춰져 있고 담당자도 열심히 뛰었는데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게 문제다. 적극행정이라는 자전거가 보이지 않는 턱에 걸려 있다. 공무원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과거 다른 사람이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중시한다. 전례가 없다면 누가 대신 책임져줘야 안심한다. 백신을 선구매해도 문제없겠느냐고 감사원에 물어야 했던 이유다. 꼭 필요하고 정해진 절차라고 공무원들은 강변하겠지만 바로 그런 수많은 절차들이 쌓이고 쌓여 우리 경쟁력을 깎아내렸다. 코로나19가 초래한 지금은 전례 없는 세상이다. 결정의 순간마다 감사원에 물을 건가. 감사원이 “하지 말라”고 했으면 지금까지도 백신 선구매는 어려웠을지 모른다.

관료들이 우리 기대만큼 혁신적으로 바뀌지 않는 게 관료 탓만은 아니다. 한국인사행정학회보 최근 논문에 따르면 적극행정 면책제도는 이명박 정부 당시인 2009년부터 논의되기 시작했다. A가 대통령의 면책 언급을 딱히 의식하지 않았다고 한 건 자기 일을 묵묵히 했을 뿐이라는 뜻이겠지만 10년 이상 면책 약속과 약속 파기가 반복되는 과정을 보면서 내성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공무원들이 그저 납작 엎드려 움직이지 않는 건 아니다. 요즘 부처마다 적극행정 공무원에게 주는 상 개수만 보면 우리나라는 이미 적극행정 선진국이다. 코로나19 피해 기업을 신속히 지원했다, 불법 사금융 예방에 적극 나섰다, 백신 개발을 끝까지 지원하기로 했다는 것들이 시상 이유다. 중요한 정책들이지만 이런 일도 적극적으로 안 하면 공무원은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궁금하다.

적극행정의 핵심 요건은 창의성과 전문성이다. 이게 없는 사람들에게 적극행정을 주문하니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다. ‘꽃보직’ 자리 승진에 목을 맨 공무원과 세(勢) 확장을 위해 낙하산 인사를 끝없이 보내는 정치인들이 공생하는 구조가 그대로다. 정권이 표를 위해 효과 검증도 안 된 사회간접자본(SOC)과 무리한 탈원전을 밀어붙이려면 창의성이나 전문성과는 거리가 먼, 영혼 없는 공무원이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현 정부 초기 기업인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면책해준다는 건 일단 책임을 지운 뒤 나중에 생각해 보겠다는 말 아닌가, 가만있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데 공무원들이 굳이 움직이려 하겠나.” 기업인들은 적극행정 하면 면책해준다는 약속이 얼마나 공허한지 진작 알고 있었다. 허울뿐인 적극행정이라면 복지부동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


홍수용 산업2부장 legm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