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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ABCD 학점 없애는 대신 책 100편 서평 내야 졸업

입력 | 2020-10-13 03:00:00

KAIST, ‘융합인재학부’ 신설… 교육혁신 실험나서




“본인이 원하는 주제의 여러 학과 강의들을 골라 듣고 싶은데 성적이 걱정된다고요? 저희 학부엔 ABCD가 없습니다.”

KAIST 1학년 학생들은 최근 이런 내용의 e메일을 받았다. 발신자는 ‘과학콘서트’의 저자이자 강연가로 유명한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48). KAIST가 내년 개교 50주년을 앞두고 신설한 ‘융합인재학부’를 알리기 위한 편지였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교육과 인재 육성이 대학은 물론 국가 차원의 과제로 떠오른 가운데 KAIST가 융합인재학부를 통해 혁신적인 교육실험에 나선다. 학부장은 정 교수가 맡았다. 전통적인 학문 간 장벽을 넘어 다양한 지식을 섭렵하고 접목하는 문제해결형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다. 다음 달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1학년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고 11월 중 신청을 받는다. 2학년 이상 학생도 전과를 희망하면 신청할 수 있다. 본격적인 학부 운영은 2021학년도 1학기에 시작된다. 학교 측은 “일단 20명 정원으로 선발할 계획”이라며 “융합연구 전문가인 교수들이 일대일 개인지도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융합인재학부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과목에서 ABCD 학점을 없앤 것. ‘통과 또는 탈락(pass/fail)’으로 기록될 뿐이다. 다양한 과목을 수강하고 싶은 학생들이 ‘전공생에게 밀려 낙제점을 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탓에 도전을 꺼리는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다.

학생들은 2∼4학년 동안 본인이 설정한 사회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를 찾고, 이를 실현하는 프로젝트 기반형 학습(PBL)을 통해 결과물(포트폴리오)을 남겨야 한다. 계량화된 성적을 취업이나 진학에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수행한 연구의 결과로 역량을 드러내게 한다는 것이다.

졸업 요건도 특이하다. 우주, 자연, 인간, 사회, 기술, 예술 등에 대한 명저 100권을 읽고 감상평을 남겨야 한다. 책은 학교가 지정한 것과 본인이 선택한 것을 섞어 읽게 된다. 감상평은 몇 장짜리 독후감 수준이 아니다. 예를 들어 2시간 분량의 영상에 책에 관한 자신의 감상을 담아 유튜브에 올리거나, 원고지 50장 분량의 서평을 써야 한다. 어떻게 보면 다소 부담스러운 과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한 수준까지 깊이 있게 책을 읽게 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KAIST는 지난해 학과 장벽을 없앤 ‘융합기초학부’를 설립한 적이 있다. 복수전공이나 부전공 형태로 다양한 전공을 섭렵할 기회를 열어뒀지만 신청자가 없었다. 학생들의 도전을 이끌어낼 매력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KAIST는 ‘파격적’이라 할 만한 요소들을 융합인재학부에 담았다.

취업 이력서마다 ‘학점기재란’이 존재하고, 대학원 진학 시에도 졸업평점(GPA)을 필수로 요구하는 국내 상황에서 무모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정 교수는 “한국이 발전하려면 구직자의 단순한 성적보다는 실제 역량을 중심으로 평가가 이뤄지고 선발되는 문화가 생겨야 한다”며 “KAIST의 혁신이 그 변화를 이끌어내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수연 기자 sy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