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과 나날/마르셀 프루스트 지음·최미경 옮김/264쪽·1만5000원·미행
마르셀 프루스트는 ‘쾌락과 나날’의 낱장들을 가족이나 이성 사이의 섬세한 감정과 대기를 떠도는 향기로 가득 채운다. 모네의 유화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들판’(1873년·오른쪽 사진)과 프루스트. 동아일보DB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의 문장은 온몸의 모든 감각을 활짝 열어둘 때 읽힌다. 수풀 사이를 은밀히 투과하는 빛줄기, 식물들의 향기, ‘발자국은 물 위에서 맑은 소리와 함께 깊은 자국을 내고 물의 일치된 색깔은 그 순간 부서진다’처럼, 시각과 청각이 팔레트 위에 섞이는 구절들.
우리는 이 작가의 이름을 16년의 시간을 바친 거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기억해 왔다. 이번에 손에 든 책은 그가 25세에 처음 펴낸 단편집이다. 화가와 음악가의 모습을 담은 시들, 에세이, 장편(掌篇·손바닥 길이) 소설들이 섞인 산문들도 두 개 장(章)을 차지한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주인공은 ‘검은 고양이가 중국 꽃병 위에 올라가 무언극의 몸짓으로 국화 향기를 맡는 것을 웃음을 띠고 지켜본다’. 대부분의 단편에서 비단과 금실이 섞인 듯 섬세한 감각의 묘사들이 사건들을 지배하거나 줄거리를 만들어간다.
사교계의 회합들은 주인공들의 한정된 공간을 넓힌다. 이성 간의 은밀한 감정 교류가 일어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창궐하는 전염병인’ 속물근성, 허식까지도 섬세한 감수성의 옷을 입는다.
‘이탈리아 희극의 몇 장면’은 이탈리아 중세극 ‘콤메디아 델라르테’의 양식화된 인물들을 빌려온다. 주인공 파브리스는 지성이 아름다움을 그르치는 여성에 이어 지성이 모자라는 여성을 겪고 지친다. 그 다음에 만난 여성은 누구였을까. 섬세한 지성을 갖췄으나 그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 여성이었다.
작곡가 레날도 안(1874∼1947)의 피아노 소품 악보까지 실은 이 책은 비슷한 분량의 책들보다 다섯 배의 값이 매겨진 채 세상에 나왔다. 친구들은 ‘지나치게 댄디’하다고 했고, 세상도 이 책을 외면했다. 그가 죽은 뒤 역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가치를 인정받기까지도 그랬다. 이 문장들의 가치는 서문을 써준 작가 아나톨 프랑스가 알아보고 있었다.
프루스트와 릴케가 활동한 시대는 100년 전 제1차 세계대전을 결산하는 베르사유 조약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그 섬세한 사람들의 세계는 왜 피와 강철 냄새의 20세기에 자리를 내주었을까. 그 스스로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이 섬세했기 때문일까.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