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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정책이 아니라 대학정책이 필요하다[동아 시론/김두얼]

입력 | 2019-11-13 03:00:00

美 대학, 비싼 학비에도 세계서 학생 몰려
미 新산업 경쟁력은 뛰어난 교수와 인재
한국은 규제로 재정 악화, 교육 질 저하
대통령부터 국민까지 대학입시만 갑론을박
좋은 대학 늘면 입시 문제도 완화돼




김두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그레고리 맨큐의 ‘경제학 원론’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경제학 입문 교재다. 미국에서 이 책값은 우리 돈으로 30만 원이 넘는다. 시장에서는 많은 경제학 교과서가 치열하게 경쟁하기 때문에 맨큐의 교과서 가격이 독점 가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책값이 비싼 일차적인 이유는 제작비용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책의 저자가 맨큐라고 적혀 있지만, 사실 이 책의 집필에는 수백 명이 참여한다. 나아가 교수들이 활용할 수 있는 문제은행과 강의자료 등까지 제공하니 가격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세계적인 석학이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만든 책이라 내용은 매우 훌륭하다. 서술이 알기 쉽고, 사례가 풍부해 이론과 현실의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세계 많은 대학 강의에서 이 책이 이용되는 까닭이다.

아무리 좋은 교과서라도 독학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만일 뛰어난 교수들로부터 이런 좋은 책의 내용을 제대로 배워서 고급 지식을 체득하고자 미국의 일류 사립대를 가려면 엄청난 학비를 내야 한다. 미국에서 가장 학비가 비싼 학교의 하나로 알려진 밴더빌트대는 한 해 등록금만 5만 달러를 넘는다. 많은 일류 사립학교도 4만 달러를 넘은 지는 한참 되었으며, 상대적으로 등록금이 저렴한 주립대도 좋은 학교들은 3만 달러 정도는 감내해야 한다.

대학 등록금이 비싼 것도 기본적으로는 비용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급 경제학자들은 실리콘밸리나 증권가 등으로 가면 수십만 달러의 연봉을 받을 수 있다. 학교가 이런 사람들을 붙잡으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연봉을 주어야 한다. 이 때문에 박사 학위를 갓 취득한 경제학 박사들이 일류 대학에 자리를 잡을 경우 받는 첫해 연봉이 10만 달러를 넘은 지 꽤 오래되었다. 빅데이터 붐으로 인해 몸값이 높아진 통계학 박사의 초봉은 최근 30만 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싼 학비에도 불구하고 미국뿐 아니라 세계 학생들이 미국의 일류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이런 뛰어난 학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몰려온 우수한 학생들과의 교류 속에서 미국의 교수들은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쏟아낸다. 미국이 신산업 부문에서 압도적 우위를 유지하는 이유다.

한국의 상황은 참담하다. 지난 10년 동안 정부는 매년 물가상승률 범위 내로 대학의 등록금 인상 상한을 고지했다. 하지만 이 허용 범위에서나마 등록금을 인상한 대학은 거의 없다. 등록금을 인상하면 정부 보조금이 줄어들 것이 뻔해서다. 10년 가까이 통제된 등록금 때문에 대학의 실질 수입은 크게 줄어들었다. 정부 지원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 교육부의 일년 예산 70조 원 가운데 60조 원은 초중등 교육에 사용된다. 고등교육에 사용되는 10조 원 중에서도 상당 부분은 국가장학금이고, 순수하게 연구나 교육에 활용되는 금액은 2조∼3조 원에 불과하다. 대학 수나 학생 수 등 어떤 면을 보더라도 충분히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립대학의 경우 재단이 전입금을 제대로 내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학교의 운영, 나아가 발전에 필요한 만큼의 재원을 전입금 혹은 적립금 활용으로부터 충당하는 경우는 미국에서조차도 극히 일부 학교만 가능하다. 미국 사립대학들의 높은 등록금이 명확히 입증하는 사실이다. 재정이 열악하니 교육의 질이 개선되기는커녕 악화될 수밖에 없다. 강사법으로 인한 구조조정 이전에도 이미 우리나라 대학의 수업들은 200∼300명 규모의 대형 강좌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초중등 학교들이 20∼30명 수준의 학생으로 수업이 이루어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연구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불행히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대통령부터 일반 국민까지 모두가 대학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입학 제도에 한해서다. 대학이 학생을 어떻게 선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갑론을박할 뿐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 지금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 그리고 보다 좋은 인재를 양성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다.

대학에서 더 높은 질의 교육과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가고 싶은 좋은 대학이 많아지면 대학 입학의 성패에 대한 집착도 줄어들어 입시 문제도 완화할 수 있다. 더 늦기 전에 입시정책이 아니라 대학정책을 논의해야 한다.

김두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