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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HBO ‘체르노빌’ 연출한 요한 렌크 감독 “유사한 비극은 진행 중”

입력 | 2019-09-15 15:44:00


미국 HBO 5부작 미니시리즈 ‘체르노빌’에서 1986년 4월 26일 폭발한 체르노빌 원전을 지켜보는 핵물리학자 발레리 레가소프(재러드 해리스)와 연료동력부 장관 보리스 셰르비나(스텔란 스카르스고르드). 극 중 사고를 수습하고 원인을 규명하려는 이들은 실존 인물들이기도 하다. HBO 제공

요한 렌크 감독(53)은 1986년 4월, 소련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를 또렷이 기억한다. 어린 시절 스웨덴 스톡홀름까지 도달한 방사능 낙진을 경험했다. 도시엔 북부지방에서 온 육류를 먹으면 안 된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몇몇 친구들은 남반구로 이민을 갔다. ‘방사능 공포’는 그에게도 일상이었다.

미국 HBO의 5부작 미니시리즈 ‘체르노빌’을 연출한 그는 6일 전화 인터뷰에서 “익숙한 참사라고 생각해왔는데 깊이 알아볼수록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3년 동안 작가 크레이그 메이진이 소련 정부 문서들을 수집하고 관련자들을 인터뷰해 쓴 각본을 바탕으로, 그는 지난해 촬영 전까지 체르노빌 사고를 다룬 책들과 다큐멘터리를 닥치는 대로 찾아봤다. 우크라이나 생존자들에게서 직접 들은 참상은 그를 숙연해지게 했다.

“동유럽에서 제 아이 4명을 돌보면서 촬영을 해야 하는데 쉽지 않을 것 같아 처음에는 연출 제안을 거절했어요. 그런데 시나리오를 읽다보니 생존자, 희생자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더라고요.”

‘체르노빌’을 연출한 스웨덴 출신 요한 렌크 감독은 “스칸디나비아인으로서 절망과 우울한 스토리에 본능적으로 끌렸다”며 “5부작으로 나뉜 긴 영화를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촬영을 했다”고 말했다. 요한 렌크 제공


재난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파는 철저히 배제했다. 드라마지만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체르노빌’은 당시 사고를 담담하게 담아냈다. 22일 열리는 제71회 에미상 시상식에선 최우수 미니시리즈 작품상 등을 포함해 19개 부문 후보로 올랐다. 5월 방영 동시에 로튼토마토(신선도 95%), 메타크리틱(9.3점) 등 유명 영화리뷰 사이트의 호평도 이어졌다.

미국 드라마 ‘워킹데드’(2010년) ‘브레이킹 배드’(2009~2010년) 등 상상에 기반한 세계를 연출해 온 그도 이번만큼은 “진실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00일 간의 촬영을 위해 방문했던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 일대는 “1980년대 소련을 재현할 완벽한 장소”였다. 1986년식 우크라이나 소방차를 찾는 데만 꼬박 4개월이 걸렸고, 낡은 모직 양복이나 스카프, 오래된 시계, 전화기 등을 구하기 위해 온라인 사이트 이베이나 우크라이나 키예프 벼룩시장을 헤맸다. 촬영도 체르노빌과 같은 기종으로 2009년 가동이 중단된 리투아니아의 이그날리아 원전에서 했다.

“그때 그 곳에 있었던 누군가로부터 ‘사실적이고 정확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실제 몇몇 우크라이나 사람들로부터 ‘놀랍다’는 연락을 받아서 만족해요.”

‘체르노빌’은 원전 사고를 통해 국가적 재난 뿐 아니라 개개인의 비극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치명적인 방사능에 노출된 원자로 지붕 위 흑연 조각을 군인들이 옮기는 장면도 실제 작업 영상을 참고해 ‘롱테이크’ 촬영과 컴퓨터그래픽(CG) 기술을 활용했다. ‘체르노빌’은 지난달 14일 스트리밍 사이트 ‘왓챠플레이’를 통해 국내에도 공개됐다. HBO 제공

치밀한 묘사 덕분에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달됐다. 군인들이 원자로 위 흑연 잔해를 치우는 명장면도 시청자들의 ‘간접 체험’을 위해 철저히 계산한 결과다. 방사능 피폭 허용치를 고려해 1인당 주어진 90초 작업시간을 ‘롱테이크’로 담았고 스테디캠(대상을 미끄러지듯 따라가면서 계속 이어서 촬영하는 기법)을 활용해 긴박감을 살렸다.

“리허설만 3일이 걸렸어요. 개인적으로 롱테이크 촬영을 선호하진 않지만 그 장면은 그렇게 찍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실제 긴박하고 두려운 90초를 경험하길 원했거든요.”

끔찍한 사고가 주는 공포도 침묵이나 무미건조한 음악으로 극대화됐다. 이그날리아 원전에서 얻은 기계음, 금속음 같은 기괴한 소리를 효과음으로 활용했다. 렌크 감독은 “때로는 침묵이 몰입을 강화시킨다. 보이지 않는 방사능의 위협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극 중 폭발 사고를 은폐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소련 관료들의 모습처럼, 렌크 감독은 “유사한 비극은 진행 중”이라고 강조한다.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라는 첫 대사는 현대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질문이에요. 여전히 진실보다 자신들을 위해 거짓을 선전하는 기회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갉아먹고 있죠.”

‘체르노빌’에서 소방차들이 폭발한 원전의 화재를 진압하는 장면. HBO 제공


‘체르노빌’의 흥행으로 참사현장을 찾는 ‘다크투어리즘’도 크게 늘었지만, 그는 아직 체르노빌을 가보지 못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촬영 당시 대형 산불로 방문 계획이 무산됐기 때문. “그곳에 갈 날을 고대하고 있다”던 그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게재된 관광객들의 외설적이고 우스꽝스런 인증사진들에 대해서는 “엄숙함과 존중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인 연출을 보여준 그는 독특하게도 1993년 ‘스타카 보’라는 가수로 데뷔했다. 이후 마돈나, 비욘세, 데이빗 보위 등 유명 가수들의 뮤직비디오와 캘빈클라인, 아르마니 등 브랜드 광고 연출로 경력을 쌓아왔다. 박찬욱 감독의 광팬이기도 한 그는 “세계시장에서 한국 영화들이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추켜세웠다.

“제 친구인 작가 마이클 레슬리가 드라마 ‘더 리틀 드러머 걸’(2019년) 각본을 박 감독과 함께 작업했는데 정말 질투가 나더라고요. 하하.”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