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뉴스 포섭된 디지털세대, 극단주의 음모론에 무방비
박용 뉴욕 특파원
미국에서는 총기 사건으로 한 해 4만 명이 숨진다. 심리적 문제 등 이상 징후가 보이면 총기 사용을 막는 ‘적기(red flag)’ 규제를 연방 차원에서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하지만 총기는 도구일 뿐이다. 사람들의 관계를 뺏고 뺏기는 ‘제로섬의 관계’로 보고 내 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총기를 들이대는 혐오주의의 뿌리를 들어내지 못하면 비극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3일 엘패소 월마트에 난입해 무자비하게 총기를 난사한 21세 백인 청년은 사건 직전 “히스패닉의 텍사스 침공” 운운하는 반이민, 인종주의 선언문을 극우 온라인 게시판에 올렸다. 3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이슬람 사원 테러도 거론했다. 줄리엣 카이엠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는 ‘외로운 늑대는 없다’는 워싱턴포스트(WP) 기고문에서 “백인 우월주의 증오는 집단적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비슷한 생각을 가진 개인들이 ‘동류의식’과 ‘사명감’을 형성하고 집단화, 세계화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는 “숲속의 부족회의에 참가한 부족원을 외로운 늑대라고 누구도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혐오주의 음모론은 이런 빈틈을 파고든다. NYT는 가짜뉴스가 ‘대본’처럼 잘 짜인 공통된 패턴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건강, 성 정체성, 인종 등 민감한 소재를 찾아내고 세상이 떠들썩해질 ‘대담한 거짓말’을 만들어내고 거짓말을 진실의 조각으로 포장해 그럴듯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를 널리 전파할 ‘유능한 바보(useful idiot)’를 찾아내 음모론을 구석구석까지 전파한다는 것이다. 외로운 늑대가 유능한 바보를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미국 사회가 보여주고 있다.
과거엔 음모론이 전 세계로 퍼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디지털 시대에는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진다. 디지털 공간에 국경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문제는 미국 사회를 넘어 전 세계가 안고 있는 고민이다. 혐오주의의 가짜뉴스 대본을 판별하는 능력이 없으면 누구나 ‘유능한 바보’로 포섭돼 테러 공범으로 전락할 수 있다.
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