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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갈등 이상적인 해법은 ‘외교적 해결’, 현실은… [논설위원 이슈 칼럼]

입력 | 2019-07-24 03:00:00

한일 갈등 뿌리와 해소책은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한일관계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다. 일본은 4일부터 반도체 등의 핵심 소재 3가지에 대해 수출 규제를 강화한 데 이어 다음 달 추가 조치에 나설 것을 예고해 외교분쟁에 무역을 끌어들였다는 비판을 사고 있다. 한일청구권협정,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중심으로 한일 분쟁의 뿌리와 해법을 모색해본다.

○ 불완전했으나 불가피했던 한일협정

먼저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 건설을 위해 자금이 필요했다. 5·16에서 한일기본협약 조인까지의 과정을 외교문서와 증언으로 엮은 ‘실록 박정희와 한일회담’(이도성 편저·1995년)에서는 당시 박 정권이 어떤 자세로 회담에 임했는지 잘 드러난다.

“우리가 언제까지 미국놈들에게서 밀가루나 얻어먹고 사는 게 자존심을 지키는 거냐? 나라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다는 게 내 신념이다. 설사 굴욕적인 측면이 있더라도 우리가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두고두고 왜놈들에게 더 큰 굴욕을 받아가며 살아야 할 것이다.”(1964년 박 전 대통령이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에게 한일협상 막후교섭을 맡기면서 한 말, 박태준 회고)

1962년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왼쪽)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의 회담 장면.

박정희 정부는 1965년 일본 정부와 한일기본조약과 한일청구권협정 등 1개 조약과 4개 협정을 체결해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청구권협정 제1조에는 “일본이 한국에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의 경제협력을 제공한다”는 내용이, 제2조에는 “청구권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배의 불법성이 명시되지 않고 모호하게 처리됐다. 조약 제2조에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문안만이 실렸다. 한국 정부는 이를 1910년 강제병합 등 과거의 조약이 체결 당시부터 불법이고 무효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일본은 과거 조약은 합법적이고 유효했으나 1948년 한국 정부 수립으로 무효가 됐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은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한국은 패전국인 일본과 승전국 자격으로 강화조약을 맺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참가하지 못했고,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은 당시 국제질서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후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5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일본 내에서는 ‘독립축하금’이라 했다)을 제공한 것으로 청구권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이 같은 한일협정의 불완전성은 이후 논란의 불씨로 남았다.

○ “일제 불법 식민지배 피해의 위자료”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 판결은 이 같은 한일관계의 구조적 모순을 정조준했다. 원고들이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대법원은 피해배상의 성격을 일제의 불법적인 식민지배에서 생긴 피해에 대한 위자료 개념으로 봤다. 배상금도 1억 원이란 구체적인 액수를 제시했다. 일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묻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셈이다.

한국의 사법부 판단과 외교협정 사이에 모순이 생겼다. 일본 정부는 판결 이후 한국 정부의 입장을 계속 물었다. 우리 정부는 “삼권 분립 원칙에 따라 사법부 판결에 대해 행정부가 왈가왈부할 수 없다”며 ‘사법부 판단 존중’ 자세를 고수했다. 그러나 원고들이 위자료를 받기 위해 기업의 국내 자산에 대한 압류와 현금화 조치 등에 들어가면 일본 정부는 자국 기업이 받을 재산권 침해에 대응했다. 결국 외교 문제로 번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흔히 한국인 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을 논할 때 ‘개인 청구권’이 인정되느냐 여부를 따진다. 일본 정부의 일관된 입장은 “개인 청구권은 있다. 그러나 외교적 보호권은 없다”이다. 소송할 자유는 있지만 소송에서 이겨도 그 권리를 정부가 외교적으로 보호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 공습 피해를 입은 일본인들이 피해배상 소송을 낼 때 일본 정부가 내세워온 논리였다.

○ 한국은 1+1기금, 일본은 중재위 주장

어떻게 풀어야 할까. 원론적인 대응책은 “외교적 해결”이다.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풀어야 할지 명확하지 않다. 현실에서 양국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마주 앉을 기회조차 없었다. 일본 정부는 1월부터 청구권협정에 명시된 중재위 절차를 시작했으나 한국은 반응이 없었다. 한국 정부는 판결이 난 지 8개월 만인 지난달 19일 양국 기업이 기금을 만드는 ‘1+1’ 안을 일본에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판결 직후부터 공로명 전 외교부 장관, 신각수 전 주일대사 등 전문가 상당수가 한일 기업들의 출연으로 기금을 조성하고 한국 정부가 역할을 하는 ‘2+1’ 안을 제시해왔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기금 조성을 위해서는 특별법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기금 구제의 인원 규모와 법적 시효를 확정하고 형평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가령 2007년 우리 정부가 특별법 입법을 통해 강제징용 피해자 7만2000여 명에 대해 총 6800여억 원을 지급했는데. 이들과의 균형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지난 20년간 일본의 식민지배 피해와 관련된 배상 소송을 도맡다시피 해온 최봉태 대한변협 일제피해자인권특별위원장은 뜻밖에도 “외교적 협의를 통한 해결 외에 방법이 없다”며 ‘2+2’의 그림을 말했다. 한국 법원이 판결을 통한 해결만 고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삼권 분립을 방패삼아 이 문제를 방치해온 한국 정부의 잘못이 적지 않다”며 일본이 요구하는 외교적 협의에 당당히 응할 것을 요청했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는 한 걸음 나아가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보상해줘야 하는 이유를 특유의 논리로 주장했다. “대법원 판결은 대한민국이 1948년 신생국가로 건국됐다는 ‘단절론’이 아니라 1920년 이후 정부를 가졌고 조선인들은 대한민국 국민이었다는 입장에 기반한다. 그렇다면 임시정부하에서 발생한 국민 손해를 배상할 책임의 일부는 우리 정부가 갖게 된다.”

이원덕 교수는 또 다른 선택지로 국제사법재판소(ICJ)를 들고 있다. 한일 양국 최고사법기관이 정반대 판결을 내렸으니 “전쟁을 하지 않는 한 평화적 해결은 제3자에게 가져가는 것”이라는 얘기다. 그는 ICJ에 갈 경우 한국 일본 모두 부분승소, 부분패소가 될 가능성이 커 재판 과정에서 타협이 이뤄질 가능성도 작지 않다고 본다.

강제징용 문제를 다룬 영화 '군함도'의 한장면.

익명을 요구한 한 현직 판사는 역설적으로 우리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기 위해서라도 ICJ에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대법원 판결이 국제적 조롱거리가 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강제징용은 국제적 강행규범을 위반한 사안이므로 ICJ에서 그 타당성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국가가 개인 청구권을 대신 소멸시킬 수는 없다.”

국제적 강행규범은 노예제 금지, 고문 금지처럼 모든 나라를 구속하는 국제법상 최상위 규범을 말한다. 그는 나아가 현재 ICJ 판사들의 판결 성향이나 인적 구성을 볼 때도 한국에 불리하지 않은 싸움이라고 강조했다.

ICJ는 지금까지 상당수 외교전문가가 기피해온 선택지다. 무엇보다 ‘패소 리스크’ 탓이 크다. 큰 소송에서 혹시라도 패소하면 국내로 돌아와 입게 될 후폭풍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이는 독도 영유권에 대한 분쟁이 커질 경우에 대한 우려로 이어진다. 한번 ICJ로 가게 되면 일본 측이 독도 문제를 놓고 ICJ로 가자는 카드를 들고 나올 경우 피하기 어렵지 않으냐는 얘기다. 그러나 ICJ는 양국이 재판에 응하겠다고 해야 재판이 시작된다. 사안에 따라 응하느냐 마느냐는 우리가 정할 수 있다.

중재위나 ICJ를 옹호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시간 벌기’를 의식하는 입장도 적지 않다. 지금의 한일 간 정면충돌을 불사하는 대립을 멈추고 냉각기를 가진 뒤 화해의 길을 찾자는 의도가 깔려 있다. 한일 간의 1965년 체제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주장도 등장한다. 한일 관계는 제대로 된 과거사 정리, 화해 없이 출발했고 냉전구조 아래 안보와 경제 두 측면에서 묶여 있었으나 더 이상 이 같은 구조가 유지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우린 어디까지 준비가 돼 있는 걸까.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