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日발목 잡은 관료제와 규제…지금 우리와 다르다고 할 수 있나
고기정 경제부장
“은행 점포의 수와 인원까지 지시하는 ‘점포행정’은 금융회사 조종의 최대 도구다. 그 결과 중소 금융회사들은 금융당국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러면 당연히 금융당국과 금융회사 간 모종의 거래가 이루어진다. 우량 은행들은 (진입 규제의 틀 안에서) 편안한 조건으로 영업할 수 있기 때문에 당국의 뜻을 받아들인다.”(관료 출신 금융회사 임원)
“공원 하나를 만들거나 재개발사업을 하거나 간에 인허가를 얻기 위해선 몇 번씩 중앙정부로 직접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보조금 신청 서류를 작성하는 데만 직원 전체가 하는 일의 20% 정도를 빼앗긴다. 여기에다 중앙정부에서 위임한 사무를 합하면 중앙정부와 관련된 일이 전체의 7할이나 된다. ‘3할 자치’라는 말의 근거가 바로 이것이다.”(지자체장 출신 정치인)
책이 나올 때쯤 ‘저팬 배싱(일본 때리기)’은 글로벌 유행이다시피 했다. 한국 언론도 ‘일본 실패학’을 보도하곤 했다. 일본 경제가 가라앉은 게 어디 관료들만의 책임이겠는가. 그럼에도 당시 자료를 들여다보면 플라자협정에 따른 엔화 가치 급등, 인구 감소와 고령화 등 다른 요인보다 ‘규제 지옥’을 만든 일본 관료사회를 꼬집는 글들이 많다.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교수는 ‘일본 경제 위기 보고서’에서 일본이 실패한 첫째 이유로 광범위한 규제 등 일본식 정부 모델의 한계를 지목했다. 오죽하면 일본 후생성 소속의 한 의사는 미국에 건너가 “미국이 압력을 넣어 일본의 관료제도를 바꿔 달라”고 호소하기까지 했다.(동아일보 1995년 2월 12일자)
관료와 규제는 한 묶음이다. 공무원이 바뀌지 않고는 규제가 바뀌지 않는다. 한국도 대통령까지 나서 규제 혁파를 주장했지만 규제가 개선되지 않는 건 그것을 쥐고 있는 공무원들이 바뀌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규제망국론’이 아닌 ‘관료망국론’인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일 게다. 현 정부가 최근 들어서야 규제 샌드박스 등을 도입하고 있지만 아직은 규제 해소가 요원하다. 이재웅 쏘카 대표가 “어느 시대의 (경제)부총리인지 모르겠다”고 한 건 현장의 체감규제가 어떤 수준인지 말해준다.
“모든 산업은 어떤 부처의 과(課)에 등록돼 보호 육성 규제를 받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관청에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로 돼 있다. 새로운 산업이 태어나면 이 산업을 어느 부처가 가져가서 지배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부처 간에 사투가 벌어진다. 주무 과가 돼 인허가권을 손에 넣으면 반드시 하나 둘 관련 단체가 만들어지고, 그 단체에 낙하산 인사를 내려보낼 자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저자가 지적한 당시 일본의 먹이사슬 구조다. 한국 공무원사회가 이런 정도는 아니라고 자신 있게 부인할 수 있었으면 싶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