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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의 마음의 지도]‘강하게 깨물기’를 집행유예하자

입력 | 2019-01-04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학자·서울대 명예교수

한 해가 지났습니다. 지난해에 후회 없이 사셨는지요? 후회 없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후회하려고 태어났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만 하면서 그 의미를 알고자 하는 노력은 잘 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후회는 그 자체로도 마음과 몸의 에너지를 소비하지만 후회의 의미를 깨닫고 활용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후회할 일입니다.

후회의 사촌 격이라고 할 만한 ‘애도(哀悼)’에 관한 프로이트 박사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면 “애도란 잃어버린 대상에 마음의 에너지가 고착되어 있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후회 역시 잃어버린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살아가면서 얻는 것도 있지만 많은 것을 잃어버립니다. 완벽하게 얻고 아무것도 잃지 않는 삶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그런 삶을 꿈꾸며 삽니다.

역설적이지만 사람은 후회를 통해 성장합니다. 후회는 필요한 정신현상이며 성장의 동력이 됩니다. 문제는 후회가 쓰는 에너지가 공격성이라는 점입니다. 후회를 뜻하는 영어 단어(remorse)의 어원은 ‘강하게 깨물다’입니다. 반려동물이 주인을 물지 않도록 길들이는 것처럼 후회를 움직이는 공격성도 순화시켜야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공격성의 고삐가 마구 풀리면 파괴적인 결과가 초래됩니다. 후회만을 위한 후회는 되풀이되면서 마음에 지름길을 냅니다. 일단 길이 나면 습관이 되어 자동적으로 움직입니다. 후회는 늘 비난해야 할 대상을 찾습니다. 부모가 제일 만만합니다. 제일 가까운 사이이니 비난해도 보복당할 가능성이 적습니다.

습관이 된 후회는 악순환의 고리를 따릅니다. 후회하면서 현재를 보람 없이 소비합니다. 그러면 후회해야 할 시간과 일이 늘어나고 후회의 총량이 산처럼 쌓입니다. 해법은 악순환의 고리를 잘라내는 겁니다만 일단 습관이 되면 쉽지 않습니다. 후회하는 마음이 닥쳐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마음은 물론이고 몸에도 후회의 충격으로 가슴이 아프고 식욕이 떨어지고 잠이 안 온다면 위기입니다. 이때는 힘들어도 일단 후회의 악순환 고리를 ‘집행유예’시켜야 합니다. 피해를 준 다른 사람이나 부조리한 사회를 마음과 몸으로 원망하기보다는 내가 겪고 있는 후회의 본질과 의미를 탐색해야 합니다. 일단 후회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익숙하지만 부적응적인 삶의 방식을 바꿀 기회가 마련됩니다. 후회는 잃어버린 것을 보상받기 위함입니다. 더 나아가 성장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박적으로 되풀이되는 후회는 자동차 공회전처럼 도움이 안 되고 후회할 것만 더 만들어냅니다. 지나치면 자기 파괴로 가는 쉬운 길입니다.

후회로 푹 젖어 있는 삶을 털고 새로운 삶에 접속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공격성 외에도 후회에 따라붙는 감정이 죄책감이어서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흔들리는 자신을 일단 단단하게 잡아야 합니다. 죄책감은 스스로 벌을 받아야 한다는 충동도 불러오고 후회는 증폭됩니다. 자신의 힘만으로 용기가 안 나면 주저하지 말고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후회 습관을 고치려면 관계를 재정립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나와 나 사이의 관계도 후회의 그늘에서 벗어나도록 다시 세워야 합니다. 대인관계의 후회는 좋아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의 균형이 깨져 미움이 더 커졌다는 뜻입니다. 갈등을 해결해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문제도 나에 관한 존중과 비하(卑下) 사이의 다툼에서 벗어나야 해결됩니다. 관계가 모두 재정립되면 낭비하는 삶이 아닌 창의적인 삶이 시작됩니다. 그러지 못하면 정서적으로 움츠리고 스스로를 비하하는 삶에 머무를 뿐입니다.

후회로 이어진 사랑과 미움의 갈등은 과거의 경험에서 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과거에 경험해서 마음에 굳게 자리 잡은 불만족스러운 관계가 현재의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겁니다. 해결하려고 애를 써왔지만 자신의 적응과 성장에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 방어기제들을 이제는 정리하고 바꿔야 합니다. 과거를 털고 현재를 살고 미래를 꿈꾸지 않으면, 낭비되는 현재는 후회해야 할 과거로 쌓여 고통이 더 커질 겁니다. 예를 들어 후회하는 마음에 다른 사람을 괴롭혀 결국 나를 괴롭힌다면 잘못된 선택입니다. 후회가 후회로 끝나면 허망합니다. 후회는 직면해서 정체를 밝혀야 정리됩니다. 습관성 후회를 의식과 분별의 영역으로 올려서 처리해야 합니다. 숨겨진 나를 찾아내고 헛된 삶을 강요하는 나를 버려야 참된 나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열두 달이 지나면 한 해가 어김없이 끝나고 새해가 시작되는 이유를 마음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지난해의 후회를 새해에 이어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미 지나간 삶은 과감하게 마감하고 2019년도 신판 인생을 펼쳐 나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후회만 되풀이하며 내가 나를 안아줄 수 없다면 이 세상에 누가 그리 해줄 수 있을까요? 만성적인 후회는 자기 파괴로 이르는 길입니다. 쓴 약이지만 가장 좋은 처방은 ‘정체성’의 계발과 개체로서의 독립입니다. 후회는 더 나은 삶 또는 절망적 삶을 선택하는 갈림길이자 기회입니다.
 
정도언 정신분석학자·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