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창호의 희생이 헛되지 않길”…10명의 친구들이 해낸 ‘윤창호 법’ 제정

입력 | 2018-12-23 15:54:00


윤창호 씨 사건 첫 공판이 열린 7일 부산 동부지법 앞에서 친구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박경모 기자=momo@donga.com

윤창호 씨는 여간해선 애정표현을 하지 않던 ‘부산 남자’였다. 새벽까지 소주를 마시며 고민을 나눴던 9월 22일 이영광 씨는 창호에게서 처음으로 “친구야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을 듣고 감격했다. 하지만 사흘 뒤 창호는 만취한 운전자가 몰던 차량에 치였고, 다시는 창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10명의 친구들이 해낸 ‘음주운전 처벌 강화’

음주운전을 중하게 처벌하는 ‘윤창호법’ 국회 본회의 통과를 위해 힘을 모으고 있는 친구들. 윤창호 씨 친구들 제공

그가 사경을 헤매다 세상을 떠난 지 20일 만인 11월 29일 음주운전 치사·상 처벌을 강화하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12월 7일에는 음주운전 단속 기준치를 낮추는 도로교통법도 국회를 통과했다. 이른바 ‘윤창호 법’이 제정된 것이다. 음주운전 단속 시 혈중알코올농도 기준치를 현행 0.05%에서 0.03%로 낮추고, 음주 운전 중 사망 사고를 낼 경우 현행 1년 이상 유기징역에서 3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무기징역으로 형량을 높인 것이 핵심내용이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에 위험운전치사상 조항이 도입된 것은 2007년이다. 교통안전 전문가들은 당시부터 처벌 수위가 약하다고 지속적으로 지적했지만 법 개정은 번번이 무산됐다. 그런데 윤 씨의 친구들이 3개월 만에 어려운 일을 해냈다.

음주운전 사고 예방과 피해자 추모를 위해 직접 제작한 ‘음주운전 근절 배지’를 주문한 사람들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쓰고 있다. 윤창호 씨 친구들 제공


윤 씨 친구 10명이 처음 한 자리에 모였던 것은 윤 씨 사고 당일인 9월 25일 부산 백병원 중환자실 앞이었다. 친구들은 창호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어떤 처벌을 받는지 검색해봤다. 대부분 집행유예를 받거나 1~2년 복역한 뒤 풀려난다는 사실을 알고는 분노했다. “음주운전 사고 뉴스를 접할 때마다 분노했지만 금세 잊었어요. ‘그때 행동했다면 창호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에 많이 후회했습니다.”(이영광 씨) 창호의 희생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친구들은 머리를 맞댔다.

● “실제 처벌 강화되는지 지켜볼 것”

7일 부산 해운대구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윤창호 씨 친구들(왼쪽부터 박주연 진태경 이영광 씨). 이영광 씨의 가슴에는 직접 만든 ‘음주운전 근절 배지’가 달려있다. 박경모 momo@donga.com


위중한 창호를 두고 멀리 갈 수는 없었다. 중환자실 앞 복도에 담요를 깔고 음주운전 관련 법 공부를 시작했다. “법을 잘 몰랐고 국회에는 가본 적도 없었어요. 양형기준과 판례를 연도별로 분담해 정리했습니다. 한걸음 떼기가 너무 힘들었어요.”(박주연 씨) 청와대 국민청원을 올리고 ‘윤창호법’ 초안을 국회의원 299명 전원에게 보냈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두 달 간 전국을 다니며 윤창호법을 홍보했다. 법안 통과를 위한 서명도 받았다.

결과는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윤창호 법 원안은 음주운전으로 사망 사고를 낼 경우 사형·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 가능하도록 했다. 살인죄의 최소 형량이 5년이기 때문에 음주운전은 살인과 마찬가지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국회 심사 과정에서 3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무기징역으로 후퇴했다. “5년 하한선만은 지켜지기를 바랐어요. 3년이면 재판부가 부담 없이 집행유예를 내릴 수 있으니까요. 그때가 제일 많이 속상했어요.” 친구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윤창호씨 친구들이 제작한 음주근절 뱃지


이들의 다음 목표는 법이 개정된 만큼 앞으로 사법부가 어떤 판결을 내리는지 지켜보는 것이다. 처벌 수위가 실제로 높아지는지 감시하면서 법안에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지 살펴볼 예정이다. 음주운전 처벌 관련 세미나에도 적극 참가하겠다고 밝혔다. 내년 활동을 위해 음주운전 예방과 피해자 애도를 뜻하는 ‘음주근절 배지’도 판매하고 있다. “윤창호법으로 단 한명이라도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면 그것만으로도 정말 값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자부심을 갖고 창호를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 갈 길 먼 교통안전사회 실현

음주운전 처벌은 강화됐지만 교통안전사회 실현을 위한 과제는 아직 많다. 전문가들은 대표적으로 ‘음주운전 시동잠금장치’ 의무화, 교통사고처리특례법 폐지 등을 꼽는다. 시동잠금장치 의무화는 상습 음주운전자의 차량에 음주 측정 장치를 설치해 음주상태에서는 시동이 걸리지 않도록 한 것이다. 2017년 더불어민주당 김영호, 자유한국당 송희경 의원이 이를 반영한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아직 통과되지 않았다. 지난달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경찰청 등의 연구와 공청회를 거쳐 내년 3월까지 법안을 처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교통사고처리특례법 폐지는 ‘보험처리하면 그만’이라는 교통사고에 대한 안이한 법 인식을 없앨 것으로 기대된다. 교특법은 피해자가 사망·중상해를 당하지 않거나, 횡단보도에서의 사고, 중앙선 침범 같은 12대 중과실이 아닌 모든 교통사고의 가해자가 종합보험에 가입한 경우 법적으로 책임을 묻지 않도록 하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한 ‘가해자 보호법’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바른미래당 소속인 주승용 국회 부의장이 내년 중 폐지를 목표로 관련 법안을 마련 중이다.

이 밖에 아파트 단지, 주차장 같은 ‘도로 외 구역’에서의 교통사고 예방과 피해자 보호를 위한 법안 마련도 속도를 내고 있다. 이를 반영한 민주당 민홍철 의원의 도로교통법 개정안 등이 국회에 계류돼 있다.

▼“세계 교통안전 정책에서 한국의 역할 앞으로 커질것”▼


“1년 정도 국제기구에서 일을 해보니 한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며 배운 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김영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교통포럼(ITF) 사무총장이 10월 9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OECD 본부에서 사무총장 취임 후 첫 1년 간의 소회와 앞으로의 세계 교통안전 정책과 관련한 계획을 소개하고 있다. 파리=서형석 기자 skytree08@donga.com


10월 9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본부에서 만난 김영태 국제교통포럼(ITF) 사무총장의 소회다. 그는 59개 회원국 교통정책의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OECD ITF의 첫 아시아계 수장이다.

김 총장은 ‘교통사고 사망자 2000명대 시대’를 준비하는 한국의 경험이 세계 교통안전을 이끄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은 내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리는 ITF 교통장관회의의 의장국으로 ‘지역 통합을 위한 교통 연결성’을 주제로 회의를 이끈다.

그는 남북관계 개선에 따른 남북간 도로연결 가능성에 주목한다. 김 총장은 “사실상 섬나라로서 폐쇄적인 육상교통을 갖고 있던 한국이 대륙과 연결되면 세계 교통안전 정책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 것”이라며 “도로를 연결하더라도 국가 간에 시설, 교통법규가 다른 것처럼 안전과 관련해 한국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조언했다.

1993년 공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국토교통부 교통정책조정과장이던 지난해 6월 ITF 회원국의 투표를 통해 사무총장으로 선출돼 지난해 8월부터 재직 중이다. 2007년 정회원국이 된 한국에서 첫 아시아계 사무총장을 배출한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2006년 출범한 ITF는 1953년 유럽 16개국이 제2차 세계대전 후의 교통시설 및 정책 재건을 위해 설립한 유럽교통장관회의(ECMT)가 모체이고, 유럽의 영향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김 총장은 ‘사회적 약자의 이동권 강화’에 관심이 많다. 한국에서의 경험 때문이다. 그는 “한국은 1990년대 초반 한 해 교통사고로 약 1만3000명이 목숨을 잃던 나라다. 사망자 수가 지난해 4185명으로 감소한 건 세계가 감탄하는 성과”라며 “매년 전 세계에서 교통사고로 하루에 약 3500명꼴로 숨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를 2000명대로 줄이려면 보행자 보호를 위한 차량 속도 하향, 전 좌석 안전띠 착용, 고령자 보호 등의 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돼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남녀노소 누구나 안전하고 편리한 교통을 누리는 ‘교통복지’ 실현을 위해서다.

동아일보가 2013년부터 이어오고 있는 교통안전 캠페인 연속보도 등 언론의 역할에 대해 김 총장은 “언론은 ‘교육’의 역할로서 교통안전에 매우 중요한 존재”라고 말했다. 그는 “언론은 정부가 파악하지 못한 교통안전의 사각지대를 발굴하는 힘이 있다. 언론의 넓은 시각을 통해 보다 다양한 교통정책이 발굴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 총장의 임기는 2022년 8월까지다. 연임이 1차례 가능해 최장 2027년까지 ITF를 이끌 수 있다. 그는 임기동안 비(非)서방권의 낙후한 교통안전을 개선하는데 역량을 쏟을 계획이다. 김 총장은 “한국 정부와 한국교통안전공단 등의 교통안전 정책성과가 세계로 뻗어나갈 기회가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서형석 기자 skytree08@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