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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하정민]한국의 ‘비커밍’을 기다리며

입력 | 2018-12-06 03:00:00


서구 유명인의 회고록 출간은 그 자체로 거대한 비즈니스다. 엄청난 인력과 자원이 투입되고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존재하며 세계 곳곳에서의 강연과 인터뷰 일정은 팝스타의 월드투어를 뺨친다. 왜? 돈이 되니까.

미셸 오바마가 쓴 ‘비커밍(Becoming)’이 화제다. 지난달 13일 출간 후 2주 만에 미국에서만 200만 부가 팔렸다. 호기심에 샀다 글솜씨에 놀랐다. 판권이 무려 3000만 달러(약 330억 원)란 보도도 있었으니 상당한 수준의 조직적 도움은 있었을 거다. 그렇다고 원래 못 쓴 글을 살려낼 순 없다. 본판이 좋아야 화장도 잘 먹는다.

이 책은 ‘금성에서 온 미셸’이 ‘화성에서 온 버락’에게 바치는 절절한 연서(戀書)다. 성공을 향해 일직선으로 질주하던 질서의 화신 미셸은 혼돈과 무질서의 남자 버락을 만난다. 청혼을 질질 끌고 가사와 육아에 소극적이며 의정활동으로 툭하면 집을 비운다. 그가 대통령이 되자 미셸의 자아와 인생 경로가 송두리째 흔들린다. 그래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미셸을 책과 글의 세계로 인도한 사람도 남편이다. 둘이 다툴 때 남편은 늘 책이란 동굴로 피신했다. “버락은 글쓰기가 마음을 치유하고 생각을 명료하게 만든다고 여겼다. 내게는 생각을 글로 기록한다는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다. 버락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저자의 솔직함도 돋보인다. 가난, 풋사랑, 백인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프린스턴대 시절, 결혼 생활의 굴곡, 현미경 속에 놓인 백악관 생활을 숨김없이 서술한다. ‘나와 딸들이 중요한 존재인 건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행복해야 버락이 행복하고 그래야 그가 맑은 정신으로 나라를 이끌 수 있기 때문’이란 현실 인식도 인상 깊다.


책을 휘감은 달달함은 분명 다른 유명인과 대조적이다. “남편의 공직생활로 내가 희생했다. 상원 선거일 투표소에서 남편 이름 대신 내 이름을 발견해 기뻤다”는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의 ‘살아있는 전설’, “성공한 여성은 원래 미움 받는다. 완벽한 기회를 노리지 말고 기회부터 잡으라”는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의 ‘린 인’은 책 전체가 야심과 투지로 활활 타오른다. 읽기만 해도 전사(戰士)가 된 기분이다.

‘비커밍’은 다른 길을 간다.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되 방점은 ‘내’가 아닌 ‘남편’에게 찍혀 있다. 미국은 미셸 부부가 믿는 가치와 정반대의 인물을 후임자로 택했다. 재선을 준비 중인 그 후임자는 남편의 유산을 모조리 지워버릴 기세다. 이를 어떻게든 막겠다는 투쟁심이 느껴진다. 공직 출마를 부정하는 미셸의 말을 믿을 수 없는 이유다. 책에서 유일하게 솔직하지 못한 부분이기도 하다.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책을 덮고 한국 권력자들의 회고록과 적잖이 갔던 출판기념회를 떠올렸다. 낯 뜨거운 자화자찬과 학예회 수준의 습작만 기억난다. 작은 시장, 얇은 독자층, 한국 엘리트의 빈약한 글쓰기 실력 중 뭐가 제일 문제일까. 유권자로서 ‘비커밍’ 같은 저작물을 생산할 이에게 표를 던지고 싶다.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