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가 없는 나라/이정희 지음/240쪽·1만5000원·동아시아 ◇한반도 화교사/이정희 지음/760쪽·2만8000원·동아시아
화교 차별이 심했던 한국은 ‘차이나타운이 없는 드문 나라’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물론 다른 나라보다 규모가 작을 뿐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사진은 1884년 청국 조계로 시작돼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인천 차이나타운의 패루(牌樓·도시의 아름다운 풍경을 나타내고자 세우는 중국의 전통 건축 양식 중 하나). 동아시아 제공
동아일보가 1931년 7월 7일 1면에 실은 사설 ‘이천만 동포에게 고합니다’이다. 중국과 조선 민족을 이간질하려는 악의적 선전에 휘둘리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만주를 침략하려는 일제의 음모로 중국 지린성 창춘현 완바오산에서 한중 농민들이 충돌하는 ‘만보산(萬寶山) 사건’의 진상이 와전되자 조선 전역에서 화교(華僑) 배척이 벌어졌다. 평양에서는 3000명 넘는 군중이 중국인 민가를 습격하고, 돌을 던지고, 화교를 폭행했다. 집계에 따라 다르지만 당시 조선인의 손에 죽은 화교 사망자만 200명가량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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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화교사’는 1880∼1940년대 한반도 화교의 역사를 종합한 연구서이고, ‘화교가 없는 나라’는 이를 대중적으로 풀어 쓴 책이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인 3000명이 조선에 파견됐다. 이때 함께 건너온 상인들이 한국 화교의 시작이다. 예나지금이나 이주의 주요 동기는 임금 격차다. 1920년대 초 기준 조선 농부의 임금 수준은 중국 산둥성보다 약 2.8배 높았다. 광산과 공장의 노동자 수요도 많았다. 화교들이 조선으로 밀려들었다.
화교 용어에 삼파도(三把刀)라는 말이 있다. 식칼과 가위, 면도를 가리킨다. 화교들은 이 세 종류의 칼을 지니고 이주해 중화요리점, 양복점, 이발소를 차렸다. 일제강점기 중화요리점은 화교배척사건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성장했고, 1960년대까지도 전국 중화요리점 95%를 화교가 경영했다. 1897년 ‘독립신문’에 광고를 낸 ‘원태양복점’의 주인도 화교다. 1900년대 생겨난 화교 이발소는 저렴하고 서비스가 좋아 조선인과 일본인 이발소들이 규제해 달라고 당국에 요청할 정도였다.
화교는 주단포목(면직, 마직, 견직물을 통칭) 판매의 3할을 차지할 정도로 세력을 형성했다. 1938년 노래 ‘왕서방 연서’에 등장하는 ‘비단이 장수 왕서방’이 바로 그들이다. 이 밖에도 화교들은 솥과 양말 제조, 채소 재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시장의 ‘큰손’이 됐다. 명동성당의 시공을 주도한 건축기술자도 벽돌 건축 기술을 갖고 있던 화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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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이 같은 화교의 역사를 차근차근 서술해 나간다. 저자는 “근대사를 일본의 침략·식민통치와 민중의 저항 구도로만 서술하면 화교의 경제, 사회활동은 설 자리를 잃는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