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횡설수설/김갑식]조계종의 이판사판(理判事判)

입력 | 2018-08-18 03:00:00


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을 때 끝장을 본다는 의미로 이판사판이라고 한다. 본래 불교에서 이판, 이판승(理判僧)은 수행을 위주로 하는 승려, 사판과 사판승(事判僧)은 절의 재정과 관리 등을 담당하는 이들을 가리켰다. 의미가 달라진 것에 대한 추측은 여럿 있지만 정설은 없다.

▷16일 대한불교조계종의 국회 격인 중앙종회 임시회는 은처자(隱妻子·숨겨 놓은 처와 자식) 논란에 휩싸여 사퇴 압력을 받아온 설정 총무원장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을 가결시켰다. 종단 사상 초유의 일이다. 이날 지켜본 중앙종회에서는 여러 차례 의사진행 발언과 입장문 낭독을 통한 필리버스터(의사진행방해), 고함과 야유가 쏟아졌다. 본인들도 민망했는지 회의는 40여 분 만에 비공개로 전환됐다.

▷아수라장의 이면에는 이판사판의 잘못된 만남이 있다. 자승 전 원장은 1994년 종단 개혁 이후 최고의 사판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33, 34대 총무원장으로 유일하게 연임에 성공했고 4개의 종책(계파)을 묶어 종회 내 거대 여당의 산파가 됐다. 오죽하면 “반대편에 서면 정말 무서운 사람”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설정 원장은 덕숭총림(수덕사)의 가장 큰 어른인 방장(方丈) 출신으로 대표적인 이판으로 꼽혔다. 사판 세계에 뛰어들기 전까지만 해도 선승 이미지에 덕망이 높아 유력한 차기 종정 후보였다.

▷조계종 총무원장은 ‘불교 대통령’으로도 불린다. 전국 3000여 개 사찰의 주지 임면권을 갖고 있고 종단·사찰의 재산 감독, 처분 승인권, 주요 사찰의 예산 승인 및 조정권도 행사한다. 그래서 4년마다 치러지는 총무원장 선거는 종권(宗權) 경쟁이라고 한다. 지난해 선거에서 또 다른 후보였던 수불 스님(안국선원장)의 기세에 위협을 느낀 자승 전 원장이 설정 원장 측에 손을 내밀어 종권 재창출을 위한 연합이 이뤄졌다. 양측은 은처자, 서울대 학력 위조, 돈과 관련한 구설 등 이른바 설정 스님을 둘러싼 3대 의혹도 ‘돌파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는 게 정설이다. 처염상정(處染常淨), 더러운 곳에 있어도 깨끗함을 유지하는 연꽃의 지혜는 멀게만 보인다.

김갑식 문화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