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전문가 7인의 진단
북한이 27일 미군 전사자 유해 55구를 미국 측에 전달하면서 비핵화 협상에 탄력이 붙을지, 북한이 원하는 종전선언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설지 등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29일 본보가 인터뷰한 워싱턴의 동북아 전문가 7명은 “본질적인 비핵화 조치가 없는 한, 종전선언 추진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미국이 주 요리(main dish·실질적 비핵화 조치)가 빠진 식전 음식(appetizer·유해 송환 등)만으로 북한에 ‘음식값’(종전선언 등)을 치르진 않을 것이란 논리다.
전문가들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이달 초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에 요구한 진전된 비핵화 조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은 “미북 회담의 짤막한 공동성명은 비핵화를 향한 불안하고 포괄적인 약속이었는데, 이를 구체화하려는 폼페이오 장관의 노력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무시하며 싱가포르 합의정신을 위반했다”고 말했다. 이어 “비핵화를 위한 절차와 시간표를 기준으로 볼 때 워싱턴과 평양은 여전히 멀리 있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또 유해 송환 조치와 남북이산가족 상봉 추진 등에 대해 “낮은 곳에 달린 과일을 따는 것과 같은 것으로, 과거 평양이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써왔던 지연전술”이라고 분석했다.
1994년 제네바 협정에 참여했던 대화파 북한 전문가인 로버트 갈루치 전 국무부 대북특사도 “유해 송환으로 분위기가 달라질 수는 있지만 비핵화를 향한 실질적인 움직임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북-미 간 관계 정상화가 이뤄지더라도 국제기구를 통해 모든 핵시설을 감독하면서 폐기하는 절차로 연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클링너 연구원은 “북한이 비핵화 조치와 함께 한국에 대한 군사적 위협도 축소해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스콧 스나이더 미국외교협회 선임연구원도 “미국이 종전선언에 참여한다면 본질적인 비핵화 절차의 조건들에 대한 협상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래야 그 선언이 종이조각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패트릭 크로닌 미국신안보센터(CNAS) 아시아태평양안보소장은 “북한이 중대한 비핵화 조치를 취할수록 미국도 더 많은 (대북) 경제적 투자를 허용할 것”이라며 “우라늄 농축시설 폐쇄가 (그 중대한 비핵화 조치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존 햄리 소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과의 핵협정을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파기한 만큼, 북한과는 그보다 높은 수준인 완전한 비핵화 합의를 실질적으로 이뤄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의 국가안보 커뮤니티는 ‘북한이 정말 비핵화 의지가 있는지’를 묻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종전선언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정치적 행위지만 일단 미국이 이 선언에 참여하고 나면 기존의 가장 강력한 대북 지렛대인 군사옵션 명분을 잃게 된다고 전문가들은 내다봤다. 특히 종전선언 이후 북한이 ‘한반도 평화’를 명분으로 한미 군사동맹을 깨는 진전된 조치를 요구할 경우, 비핵화 협상은 본질에서 벗어나 ‘미국 대 중국-러시아’ 간 힘겨루기 양상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는 점도 우려했다. 중국 전문가인 윤선 스팀슨센터 동아시아프로그램 국장은 “종전선언 이후 북한이 중국을 등에 업고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고 말했다. 이어 “북-미가 대화를 시작한 이상 중국은 자신들의 참여 없이 한반도의 미래를 결정할 어떤 해법도 나와선 안 된다는 확고한 입장을 갖고 있는데, 이 역시 북-미 협상에 큰 변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이모어 전 조정관도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한반도 내 미군의 존속 이유가 크게 줄어드는 만큼, 북한이 미군 철수와 한미 군사동맹의 종결을 요구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스나이더 연구원은 “북한은 종전선언에 더해 미국의 간섭을 제거하거나 축소할 수 있는 평화협정까지 원하고 있는데, 이에 상응해 북한의 재래식 무기 위협 축소가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박정훈 특파원 sunshad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