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서울 안의 러시아’ 어디까지 가봤니
서울 중구 덕수궁 안에 있는 ‘정관헌’은 조선 고종 황제가 휴식을 취했던 곳으로 유명한 서양식 건물이다. 궁궐 안에 지어진 첫 서양식 건물로 고종과 가까운 사이였던 러시아 건축가 세르진 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 제공
현재 이 지역은 한국에 살거나 관광 온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인들이 ‘고향의 맛’을 느끼기 위해 찾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와 우사단로 한국이슬람교 서울중앙성원 일대의 ‘아랍거리’만큼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장소는 아니다. 광희동에서 러시아식 빵집 겸 식료품점인 ‘메도비크’를 운영하는 조차관 사장은 “최근 가게를 찾는 한국 손님들이 늘었고, 방문 문의 전화도 많이 온다”며 “러시아 월드컵을 계기로 러시아에 대한 관심이 커질 것 같다”고 말했다.
러시아 교육문화센터인 ‘뿌쉬낀하우스’를 운영하는 김선명 원장은 “문학, 음악, 과학 같은 분야에서 러시아의 위상이 높고 한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러시아에 대한 관심이 너무 부족했다”며 “서울 안에도 러시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장소가 꽤 있어 조금만 노력하면 일반인들도 비교적 쉽게 러시아를 체험할 수 있다”고 했다.》
○ 서울 안의 ‘러시아 거리’ 광희동
광희동은 서울에서 가장 쉽고, 생동감 있게 러시아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꼽힌다. 또 가장 평범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날 빵집과 음식점 안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러시아 월드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많았다. 메도비크에서 러시아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둥근 빵인 ‘리표스카’와 양고기와 소고기를 넣어 만든 빵인 ‘삼사’를 산 우즈베키스탄 출신인 세바라 씨는 “고향에서 가까운 러시아에서 월드컵이 열리니 평소보다 더욱 관심이 가는 게 사실”이라며 “러시아와 한국 모두 이번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14년간 거주한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토히로프 샤리요르 사장은 “월드컵 기간이라 러시아 사람은 물론이고 우즈베키스탄 같은 중앙아시아 사람들도 더욱 많이 식당을 찾아 식사 또는 술을 즐기며 축구를 볼 것 같다”며 “월드컵 기간 중에는 평소보다 빵을 더 많이 구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관광 온 러시아인인 율리야 스타셴코 씨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러시아의 맛을 접할 수 있는 식당과 빵집들이 꽤 많다는 게 신기하다”면서 “일본 도쿄를 여행했을 때는 러시아 음식점과 빵집을 제대로 찾아볼 수 없었다”며 웃었다.
서울 중구 광희동에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식 빵 및 음식을 파는 가게가 많아 ‘동대문 실크로드’로 불린다. 14일 오후 광희동의 한 음식점에서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에서 즐겨 먹는 빵인 삼사와 생크림빵을 화덕에서 막 꺼내 진열대에 놓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 덕수궁과 정동의 러시아 건축물
러시아와 관련된 오래된 건축물을 즐길 수 있는 곳도 있다. 서울 도심의 나들이 혹은 데이트 코스 중 하나로 꼽히는 덕수궁이 바로 그곳. 조선 고종 황제가 다과회를 열고 음악을 감상했던 휴식처인 덕수궁 정관헌(靜觀軒)은 러시아 건축가인 세르진 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졌다(많은 역사와 건축 전문가들이 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보지만 실제 이를 증명해 주는 물증이 없는 상태). 1900년 지어진 정관헌은 궁궐 내 세워진 첫 서양식 건물이다. 또 정면과 좌우 측면에 화려한 느낌이 나는 발코니를 만들었고, 붉은색 벽돌을 사용해 지금 봐도 이국적인 느낌을 듬뿍 담고 있다. 그러나 난간과 기둥머리 부분의 문양에는 한국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
김 원장은 “사바틴은 뛰어난 건축가이기 이전에 고종의 큰 신임을 받은 인물이라 조선 황실의 중요한 건물들을 설계했을 것으로 보인다”며 “사바틴 자신도 조선에 대한 애착과 관심이 컸던 인물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 황제의 서재로 지어진 중명전(重明殿) 역시 사바틴과 연관이 있는 건물로 알려져 있다. 서울 중구 정동극장 뒤편에 있는 중명전은 붉은색 벽돌, 발코니, 기둥이 어우러져 있는 서양식 건물이다. 중명전은 1899년 1층 건물로 세워졌고, 미국인 건축가인 J H 다이가 설계했다. 하지만 1904년 덕수궁 화재 후 2층 건물로 새로 지어질 때 사바틴이 설계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고종은 1904년부터 1907년 강제 퇴위당할 때까지 중명전에서 살았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과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 같은 역사적 사건도 이 건물에서 이뤄졌다.
○ 푸시킨과 차이콥스키 동상
러시아 문학과 음악에 관심이 있다면 러시아에서 국민시인으로 인정받는 푸시킨과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 인형’을 작곡한 작곡가 겸 지휘자인 표트르 차이콥스키 동상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서울 중구 롯데호텔 앞에 있는 푸시킨 동상은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산학 협의체인 한러대화가 주도해 2013년 설치했다. 현재 이 동상은 두 나라의 문화 교류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꼽힌다. 실제로 그해 11월에 열린 제막식에는 당시 한국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참석했을 만큼 러시아에서 관심이 높았다. 푸시킨 동상은 현재도 한국을 방문하는 러시아인들이 자주 들르는 장소 중 하나로 꼽힌다. 동상 앞에는 생화를 가져다 놓는 ‘러시아식’ 추모와 기념 모습도 볼 수 있다. 한러대화는 지난해 한국의 대표 문학가인 고 박경리 선생의 동상을 상트페테르부르크대에 세웠다. 러시아 측은 푸시킨 동상이 한국에 세워졌을 때처럼 공식 제막식은 문재인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이달 21∼23일)에 맞춰 열 예정이다. 제막식에는 한국 정부를 대표해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참석한다.
국립과천과학관에서도 러시아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주여행을 한 유리 가가린 흉상이 전시돼 있다. 이 흉상은 올해 4월 ‘과학의 달’을 맞아 설치됐다. 올해는 한국 최초의 우주인인 이소연 씨가 러시아의 우주인 프로그램을 통해 우주를 다녀온 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 2020년은 수교 30주년
일각에선 러시아 월드컵과 수교 30주년(2020년)이 연달아 다가오는 것을 계기로 좀 더 체계적인 ‘러시아 알기’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반도 주변 강대국 중 하나인 러시아는 한국과 오랜 역사적 관계를 맺어왔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나름대로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로 꼽힌다. 하지만 한국에서 러시아는 여전히 먼 나라다. 지난해 일본과 중국을 찾은 한국인 관광객 수는 각각 714만여 명과 452만여 명에 이르지만 러시아는 21만여 명(3분기까지)에 불과하다. 러시아의 이미지도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한반도 북부(북한)의 공산화, 아관파천, 냉전 등 한국사의 어두운 페이지에 러시아가 자주 등장하는 게 큰 이유다. 김 원장은 “러시아는 여러 면에서 한국이 제대로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 나라”라며 “한-러 합작 영화 제작이나 한국과 관련 있는 러시아 인물 탐구 등 대중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프로젝트들이 수교 30주년을 계기로 추진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