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이윽고 선수들을 가득 태운 버스 두 대가 집 앞에 도착했다. 최고급 세단들도 속속 들어섰다. 이들은 집에 들어서며 누군가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군대 사병들이 입는 카키색 패딩 차림의 중로(中老)는 편안한 웃음으로 이들을 맞았다. 그는 가위를 들고 정원에서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리를 잡은 뒤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자, 오늘은 즐겁게 마음껏 먹고 마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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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작년에 다친 무릎은 좀 어떤가.” “딸이 올해 세 살 됐겠다.” 구 회장은 선수들과 프런트들을 스스럼없이 대했다. 야구 지식은 물론이고 개인적인 신상도 모두 꿰고 있었다. 처음 만난 기자에게도 “자네는 본이 어디인가”라고 물을 정도로 소탈했다.
행사 내내 이리저리 술잔이 오갔고 웃음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자유로운 분위기에 취한 한 외국인 선수는 구 회장 앞에서 시가를 피웠다. 직원들은 깜짝 놀랐지만 구 회장은 자신도 시가를 한 대 입에 물었다.
단목행사는 LG 선수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가장 윗사람에게 인정받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타 구단 선수들의 부러움을 샀다. 당시는 LG가 신바람 야구를 앞세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시기이기도 하다.
구 회장이 구단주를 그만두고 LG 그룹 경영에 매진하면서 단목행사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하지만 야구에 대한 애정은 여전했다. 헬리콥터로 지방 출장을 다녀오던 어느 날. 서울 잠실구장에 불이 켜진 것을 본 구 회장은 한강 둔치에 내려 곧바로 야구장을 찾았다. 갑작스러운 구 회장의 방문에 ‘의전’을 하려던 직원은 오히려 혼이 났다. “조용히 야구 보고 가게 놔두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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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회장은 1995년 봄 우승하면 함께 마시자며 일본 오키나와 특산품인 아와모리 소주를 사왔다. 생전에 그는 술통을 열 기회가 없었다. 언젠가 LG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날 구 회장도 하늘에서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아와모리를 마시고 있지 않을까.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