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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을 위한 김호의 ‘생존의 방식’]직원 보호 제도에 ‘물’을 주자

입력 | 2018-05-16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김남복 기자 knb@donga.com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조직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제도는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한다.” 홀로코스트를 연구하는 예일대 사학과 교수 티머시 스나이더가 최근작 ‘폭정’에서 한 말이다. 직장인은 법적으로 휴식을 보장받으며, 적정한 임금을 제때에 받게 되어 있다. 상사를 포함하여 회사로부터 정당한 인간적 대우를 받게 되어 있다.

하지만 주변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1년에 5일도 휴가를 가지 못하고 격무에 시달리며, 임금을 떼이거나, 욕설이나 폭력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이 있다. 회사에서 제도상으로는 재택근무나 유연근무제 등 훌륭한 복지제도를 만들고 대외홍보에 활용하면서도 정작 현실 속에서는 말뿐인 경우들이 생긴다. 불만은 직원들만이 삼삼오오 모인 자리에서 나타날 뿐, 현실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 스나이더 교수의 개념을 빌려 말해보면 직원들을 위한 이러한 제도들이 직장 현실 속에서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회사가 알아서 그 제도를 활성화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직장인들이 연합하여 요구해야 그 제도가 보호된다는 것이다.

이달 초 런던에 갔다가 조만간 한국에서도 공연을 한다는 뮤지컬 ‘마틸다’를 보았다. 초능력을 가진 5세 소녀가 ‘개념 없는’ 부모와 교장선생을 혼내주고 담임선생이 잃었던 삶을 되찾도록 도와준다는, 그리고 결국은 부모가 아닌 담임선생과 살기로 결심한다는 내용이다. 이 뮤지컬에서 핵심 단어 중 하나는 버릇없고 말을 잘 안 듣는다는 뜻의 ‘노티(naughty)’이다. 뮤지컬에 나오는 ‘노티’라는 노래의 가사 일부를 옮겨보자.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들었어. 하지만 때로는 좀 버릇없게 굴 필요가 있어. 삶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쓴웃음 지으며 참아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아. 매번 묵묵히 참아내고 받아들이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하지만 누구도 나를 위해 상황을 바꿔주지는 않아. 나만이 내 이야기를 바꿀 수 있어. 때로는 약간 버릇없게 굴 필요가 있어.”

우리는 어릴 때에는 가정과 학교에서,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직장에서 ‘윗사람의 말을 잘 듣는’ 것을 지나치게 미덕으로 여겨왔다. 때론 부당한 부모, 선생, 선배, 상사의 행동에도 그저 묵묵히 따르는 것이 ‘착한 삶’이라고 잘못 생각해온 것이 사실이다. 직장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고, 직장에서 만든 좋은 제도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때론 마틸다처럼 ‘노티’해질 필요가 있다. 부당한 조치에는 ‘버릇없이’ 굴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2014년 ‘땅콩회항’ 사건과 2018년 ‘물컵 갑질’로 시작된 사태의 중요한 차이 한 가지는 직장인들이 연대해 가면을 쓰고 공개 시위를 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회사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들이 좋아서 입사한 회사를 보호하고, 더 좋은 일터로 만드는 것이다. 회사 내에서 당연한 권리인 인간적 대우를 받도록 해달라는 것이고, 오너 일가의 불법 행위에 자신들이 동원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2014년의 사건으로 오너일가가 변화할 것이라고 공개적 약속을 했고, 기대를 했지만 결국 아무런 변화도 없었던 것을 확인한 직원들이 보호받아야 할 기본적인 제도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것이다. 대한항공을 더 사랑하는 것은 클라이언트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한 광고회사가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로 나선 직원들이다. 자신들이 몸담고 일해야 하는 회사니까.

제도를 보호하는 방법은 이번 사태처럼 직원들이 직접 나서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제도를 보호하는 정치인을 후원하는 방법도 있다. 2016년 말 한 외식업체가 4만4000여 명의 임금 83억여 원을 체불한 것을 밝혀내고 문제를 제기한 것은 한 정치인이었다. 정치 성향을 떠나 직장인은 자신과 같은 평범한 시민이 인권을 존중받으며 일할 수 있도록 대신 싸워주는 정치인을 선택해 지지하고 후원함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스나이더의 조언이 역사뿐 아니라 직장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교훈이 된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제도이다. 제도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 제도를 위해 행동함으로써 그 제도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우리의 제도’가 어떻다는 이야기는 하지도 말라. 제도는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한다.”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조직 커뮤니케이션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