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주류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판매 위스키 중 가장 많이 팔린 제품은 ‘골든블루 사피루스(25만2951상자)’로 나타났다. 2012년 출시한 이 제품은 도수가 36.5도로 통상 40도 이상인 일반 위스키보다 낮다. 위스키 본고장인 스코틀랜드에선 40도 미만 위스키는 위스키 인증을 받을 수 없다.
숙성기간이 표시되지 않은 ‘연산 미표기’ 제품이라는 점도 눈에 띄는 특징이다. 연산은 한 병에 들어있는 위스키 원액 중 가장 짧은 숙성기간을 표시하는 게 일반적이다. 연산 미표기 제품은 최소 3년 이상 숙성된 위스키 원액이 들어있지만 숙성기간을 따로 표기하지 않는다. 연산 미표기 제품 대부분은 40도 미만의 저도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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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저 12년’이 지난해 판매량 2위를 기록하긴 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위스키 시장을 주름 잡았던 ‘임페리얼 12년’이나 ‘윈저 17년’ 등은 연산 미표기 제품들에 밀려 고전하는 모습이다. 상위 랭킹 10개 제품의 점유율 변화를 보면 이 같은 분위기가 더욱 두드러진다. 2014년 국내 판매량 상위 10개 제품 중 연산 미표기 제품의 비율은 24.4%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에는 이 비중이 59.4%로 늘었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소위 고급 양주로 불리며 시장을 장악했던, 숙성기간이 길고 도수가 높은 위스키들이 최근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며 “국내 위스키 시장 크기는 매년 줄고 있지만 저도주 시장은 성장하고 있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국내 위스키 시장 매출은 10년 가까이 하락세를 기록하고 있는 반면 저도주 위스키(40도 미만) 출고량은 2014년 19만6000상자에서 지난해 69만7000상자로 급증했다.
낮은 도수 연산 미표기 위스키의 열풍은 건강과 자기 생활을 중시하는 ‘웰빙(well-being)’과 최근 나타나고 있는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 문화 확산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회식 폭탄주 문화를 이끌며 승승장구하던 숙성기간이 긴 고급양주들이 음주문화 변화 등으로 고전하고 있는 것이다. 2016년 도입된 청탁금지법으로 접대 자리가 줄어들자 상대적으로 가성비 높은 저도주가 인기를 끈 측면도 있다. 주류업계 한 관계자는 “독한 술보다는 입맛에 맞는 술을 조금씩 마시자는 문화가 젊은층을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다”면서 “가성비를 따지는 요즘 소비자들의 특성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소비자들의 위스키 취향이 변하면서 주류업계도 관련 제품들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2009년 저도주 시장에 뛰어든 골든블루를 시작으로 2014년 롯데주류가 관련 제품을 출시했다. 2015년에는 업계 1위인 디아지오코리아와 2위인 페르노리카코리아까지 저도주 경쟁에 뛰어들며 시장이 커지고 있다. 일부 업체는 스코틀랜드산 저도주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현지에서 원액을 산 뒤 호주 등으로 가져가 위스키 병에 담고 있다. 스코틀랜드에선 40도 미만 제품을 위스키로 인증해주지 않기 때문에 다른 국가까지 가는 수고를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이 같은 분위기는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 주류시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면서 “앞으로 업계에서 연산이 표기되지 않은 낮은 도수의 제품이 계속 출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강승현 기자 byhum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