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 고려대 연구실에서 13일 만난 심경호 교수는 청백의 순수예술 세계를 꿈꾼 안평대군의 삶을 “35년간의 몽유”라고 설명했다. 김경제기자 kjk5873@donga.com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이용(李瑢),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에게 이보다 잘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35년이란 짧은 생애를 보냈지만 그가 남긴 시와 글씨는 지금껏 조선시대를 통 들어서도 손꼽히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대엔 이 같은 재능이 오히려 불행의 씨앗이었다. 정치적 야욕이 넘쳤지만 학문과 예술 감각은 뒤지던 1살 터울의 형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것. 결국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한 뒤 강화도로 유배돼 사약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300여년 후 정조는 “안평대군 글씨가 국조(國朝)의 명필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건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를 흠모하는 지식인들은 끝없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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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은 아버지 세종의 재위 시절 각종 국가편찬사업에 참여했다.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한시를 직접 지었을 뿐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과정에서 한자 표준음 연구서인 ‘동국정운’의 편찬 총괄도 맡았다. 심 교수는 “세종은 학문과 서적 출판을 국가 경영의 중심에 놓았고, 이 때 만들어진 각종 편찬서들이 조선시대 지성의 뿌리가 됐다”며 “그 핵심을 안평에게 맡겼다는 뜻은 그의 학문적 수준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설명했다.
안평대군이 꿈 속에서 본 무릉도원을 당대 최고 화원인 안견에게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 그림 왼쪽에 안평이 작품 제작과정과 해설을 쓴 ‘도원기’가 함께 있다. 알마 제공
그러나 정치인과 예술가가 분리되지 않았던 시절, 이 예술 모임은 정치적 세력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심 교수의 분석이다.
심 교수는 “왕의 아들이면서 지성의 모임을 주도했던 안평의 행위는 실제 목적이야 어떻든 간에 수양대군 등 정치적 반대파에겐 권력으로 느껴졌다는 사실이 안평의 비극이 지닌 진정한 의미”라며 “예술과 정치가 여전히 분리되지 못하는 2018년 대한민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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