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외환위기는 우리 사회에 길고 깊은 후유증을 남겼다. 많은 기업과 금융기관이 문을 닫았고 대량실업으로 직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고통과 좌절에 시달려야 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한 고강도 구조개혁에 온 국민이 피와 눈물로 동참한 결과 한국은 2001년 8월 구제금융 195억 달러를 전액 상환하고 ‘IMF 사태’에서 조기 졸업할 수 있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최근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속담을 인용하며 지난 20년 한국의 경제성과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안심할 수만은 없다. 중산층 붕괴와 심각한 양극화, 안보와 경제 복합위기가 한꺼번에 닥친 엄혹한 상황이다. 청년실업률은 8월 기준 9.4%로 1999년 이후 가장 높다. 일각에선 ‘제2 IMF’를 우려하는 경고음까지 나오고 있다.
나라가 흥하는 데는 수십 년의 축적이 필요하지만 주저앉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뼈저리게 체험했다. ‘IMF 위기’는 1997년 7월 동남아 외환위기의 여파로 한국의 국가신용도가 떨어지면서 달러 곳간이 바닥나는 경제위기 형태로 다가왔으나 우리 사회의 오랜 구조적 문제가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근저에는 관치(官治)경제와 정경유착, 부정부패, 온정주의 등 ‘아시아적 가치’의 부정적 측면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다행히 외환위기는 과감한 긴축정책으로 빠르게 탈출했다. 그러나 외환위기의 원인(遠因)이었던 한국 사회의 구조적 요인은 과연 근치(根治)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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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발연구원(KDI)이 경제전문가 489명을 조사한 결과 88%가 한국 경제가 ‘냄비 속 개구리’라고 답했다. 물이 뜨거워지는 것도 모른 채 서서히 죽어간다는 뜻이다. 전문가 60%는 경제 회생의 골든타임이 1∼3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급속한 고령화에 들어선 한국이 노동시장 개혁을 서두르지 않으면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경고까지 나왔다. 그런데도 최저임금 인상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고용유연성 악화 등 반(反)기업 정책만 쏟아진다.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이 “당시 펀더멘털(기초체력)을 과신해 단기 미봉책이나 정치적 구호에만 매몰됐다”고 개탄했듯 지금도 반도체 특수로 인한 경기 회복세를 과신해 소득주도성장론 같은 정치적 실험에 몰두하며 진보의 무(無)오류성에 빠진 건 아닌지 의문이다.
글로벌 경제 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했던 정치권이 IMF 위기를 불러왔음을 돌아봤으면 한다. 여야는 최소한 앞으로 1∼3년은 고질적 대립의 정치에서 벗어나 실용적 해결책 생산에 주력하기 바란다. 먼저 정부가 끓는 냄비에서 나와 구조개혁을 이끄는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