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이광표의 근대를 걷는다]서귀포 알뜨르 비행장과 제로센

입력 | 2017-10-12 03:00:00


제주 서귀포시 알뜨르 비행장의 격납고. 제로센을 형상화한 강문석의 작품이 격납고 내부에 전시 중이다.

알뜨르. 그 뜻을 몰라도 속으로 되뇌어 보면 그냥 정겹고 아름다운 말이다.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의 들녘, 알뜨르. 아래(알)에 있는 넓은 들판(뜨르)이라는 의미의 제주 방언이다.

알뜨르를 걷다 보면 여기저기 땅 위로 불쑥 솟아난 무언가가 눈에 들어온다. 무슨 무덤 같기도 하고, 독특한 모습에 이끌려 가까이 가보면 놀랍게도 삭막한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이다. 그 위로 풀들이 무성하다. 이 구조물은 일제강점기 때 건설된 비행기 격납고. 그런데 요즘 격납고 주변으로 노란 깃발이 나부끼고, 격납고 안에선 일본 전투기 제로센이 웅크리고 있다. 이게 무슨 풍경일까.

80여 년 전, 알뜨르는 비행장이었다. 낭만적인 비행장이 아니라 중국을 공격하기 위한 군사비행장이었다. 일제는 1931∼1935년 알뜨르에 폭 70m, 길이 1.4km에 걸쳐 활주로를 조성했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7년 일제는 비행장의 규모를 늘리고 제주 사람들을 강제 동원해 격납고를 건설했다. 나가사키(長崎)현의 오무라(大村) 해군항공기지를 이륙한 일본 항공기는 중국 난징(南京)을 공격한 후 알뜨르에 기착하곤 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4년, 일제는 비행장의 규모를 더 늘리고 지하에 연료고, 창고, 프로펠러조정장, 계기시험장, 정비소 등의 군사시설을 확충했다. 공사에는 해군 병사나 토목회사 소속 노동자 외에도 하루 4500여 명의 인력이 강제로 동원되었다고 한다.

알뜨르 비행장에서 가장 두드러진 상흔은 격납고다.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인 격납고는 지붕의 두께가 1m에 달할 정도로 육중하다. 당시 20기가 건설되었고 현재 19기가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지금 격납고 주변에선 알뜨르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제주비엔날레 미술전시가 열리고 있다. 강제 노역의 아픔을 보여주기도 하고, 노란 깃발이 둥글게 어울려 평화의 잉태를 염원하기도 한다. 새를 보듬고 있는 소녀상도 있고, 제로센 전투기를 재현한 작품도 있다. 제로센은 태평양전쟁 때 일본 해군 항공대의 경량급 전투기였다. 제로센 작품 가운데 하나는 땅에 추락해 날개가 부러진 채 격납고에서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격납고 뒤로는 산방산이 우뚝 서 있다. 산방산은 제주인들에게 당당하고 영험한 존재다. 그 산은 알뜨르의 수난을 빠짐없이 지켜봤을 것이다.

이광표 오피니언팀장·문화유산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