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용 논설위원
내가 낸 세금이 잘 쓰이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기재부가 괜한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판도라의 책’을 공개할 리 없고,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자료에는 민감한 핵심 내용이 빠져 있으니 의문을 다 풀기 어렵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정부가 내 혈세를 함부로 쓰진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신뢰가 국민들 사이에 있다. 그래서 매년 재정건전성에 대한 논란이 일어도 SOC 사업 자체에 대한 비판은 덜한 것이다. 예산안 자료를 볼 때마다 나는 이렇게 신뢰해도 좋은지 의심스럽다.
내년 예산에 85억 원의 설계비가 반영된 춘천∼속초 철도사업은 총사업비가 2조 원이 넘는 대형 프로젝트다. 1987년 전두환 정권 때부터 검토됐지만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지난해 9월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실시한 4번째 타당성 조사에서야 통과됐으니 지역으로선 30년 만에 숙원을 이뤘다. 강원 춘천이 지역구인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으로선 지역에 자랑할 일이 생긴 셈이다.
지금도 SOC가 정치에 휘둘리는데 기재부는 번거로운 예비타당성 조사 기준을 완화하는 법 개정까지 추진 중이다. 선심성 사업을 편하게 하라고 정치인들에게 선물이라도 주겠다는 것인가.
이제까지 우리는 예산제도라는 박스 안이나 밖에서 재정문제를 봤다. 박스 안에 들어가 개별 사업 규모를 따졌고, 박스 밖에서 지역별 배분비율을 비교했다. 안철수는 박스 밖에서 호남이 소외되고 있다고 했다. 박스 안의 재정사업들이 정치적으로 추진되는데 형평성을 따지는 것은 애초 의미가 없다. 박스 속 내용물을 다 끄집어내거나 박스가 없는 곳에서 생각을 다시 해야 한다.
기재부가 ‘SOC 예산 구조조정’을 통해 줄였다는 예산이 국도, 산업단지, 홍수예보 사업비 4조4000억 원이다. 그중에는 정치적으로 불필요해도 지역민에게는 긴요한 사업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줄인 여파가 지역별로 다를 테지만 어떤 정치인의 힘이 더 세기에 어떤 사업이 구조조정을 당했는지 기재부의 ‘노란 책’만 알 뿐, 국민은 바보가 되는 형국이다.
정말 SOC 구조조정을 하겠다면 대형 국책사업의 타당성 보고서부터 검증해야 한다. 계급장과 정치색을 떼고 들여다보면 재고해야 하는 사업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재부와 정치권이 공동운명체인 현실에서 국민의 눈으로 보는 검증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재정개혁’이 공허한 구호로 끝나는 것은 개혁 대상이 되레 개혁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