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 산업부 기자
순간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최근 업무 관련 저녁식사 자리가 길어진 어느 날, 한 참석자가 질책하듯 물었다. 기자로서의 직무에 충실하기 위해 참석했는데 그는 나에게 엄마로서의 직무유기를 상기시키고 있었다.
또 다른 어느 날. 저녁에 보자는 한 취재원에게 점심이나 티타임은 어떠냐고 물었다. 저녁 약속이 너무 몰리면 낮 업무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아, 애 때문에 저녁 자리는 안 잡으시는구나.”
‘육아=엄마 책임’이라는 인식이 아직도 뿌리 깊게 박혀 있는 탓이다. 높은 주거비 등으로 맞벌이는 필수가 돼 가는데 육아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엄마에게 지운다. 그래서 많은 워킹맘들은 아이를 재우고 새벽에 부스스 일어나 밀린 업무를 한다. 기운 넘치는 20대 싱글도 파김치가 되어 퇴근하는데, 워킹맘에게는 퇴근 후 새로운 ‘일터’가 기다리고 있다. 올 초 보건복지부에서 일어난 한 30대 워킹맘 사무관의 과로사가 남 일 같지 않다는 엄마들이 적지 않은 이유다.
그렇다고 아빠들이 편히 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직책이 올라갈수록 조직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아이가 커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날 교육비를 생각하면 누군가는 일에 ‘올인’ 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 상태로는 엄마 아빠 모두 불행하다.
정부는 2005년부터 2015년까지 10년 동안 저출산 대책에 약 80조 원을 썼지만 지난해 출생아 수는 40만6300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돈만 쓰고 정책 효과는 별로 없었다는 얘기다. 사실 저출산 문제는 아주 복잡한 사회경제적 요소가 작용한 결과다. 저성장, 청년실업, 미래에 대한 비관, 높은 주거비 및 교육비, 업무시간 대비 낮은 노동생산성 등이 얽히고설킨 결과가 ‘출산 태업’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중에서 엄마에게만 육아의 책임을 지우는 사회·문화적 인식, 아빠를 저녁 식탁에서 빼앗아간 직장 문화는 다른 문제보다는 쉽게 풀릴 듯 보이지만 만만치 않다. 그런 의미에서 대선주자들의 수많은 보육 공약 중 남성 육아휴직의무제 등을 포함한 ‘슈퍼우먼방지법’에 눈길이 간다. 정책의 실현 가능성을 떠나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목표, ‘슈퍼우먼’을 강요하는 사회는 문제가 있다는 그 취지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김현수 산업부 기자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