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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칼럼]광기와 우연의 역사, 그리고 탄핵

입력 | 2017-02-27 03:00:00

정유라의 강아지가 터뜨린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
대통령 탄핵절차 안 밟았으면 지금보다 갈등 더 심했을 것
2004년 노무현 탄핵 기각 때 ‘헌법 위반’ 사과 안 한 대통령
이번이 법치주의 굳힐 기회다




김순덕 논설주간

100년 전 세계를 바꿔놓은 볼셰비키 혁명도 레닌의 귀환이 불발됐다면 없었을지 모른다. 오스트리아 지식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서 소개한 얘기다. 1917년 2월(러시아 구력·舊曆) 러시아 차르에 대항한 궁중반란이 일어났을 때 레닌은 스위스에 발이 묶여 있었다. 반드시 돌아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정부를 세우기 위해 그는 적대국인 독일과 협상했고, 결국 성공했다.

레닌의 어떤 순간을 광기로, 또는 우연으로 봤는지 츠바이크는 적시하지 않았다. 역사를 보는 시각에 따라 또 시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 원고가 담긴 태블릿PC가 보도된 2016년 10월부터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정이 나오는 2017년 3월까지의 대한민국 역사 또한 광기와 우연 아니고는 일어나라고 해도 일어나기 힘든 일들이 적지 않았다.

대통령 비선 실세 최순실의 취미가 대통령 연설문 고치기라는 폭로도 그중 하나다. 최순실의 측근이었던 고영태가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강아지 때문에 최순실과 싸우지 않았다면, 그래서 언론에 제보하지 않았다면 최순실의 국정 농단은 지금껏 그냥 덮여 있을 공산이 크다.

그 뒤 토요일마다 이어진 탄핵 촉구 촛불시위를 어떤 이들은 집단이성, 시민정신, 명예혁명으로 보지만 다른 이들은 사기꾼과 검찰, 언론에 속아서 벌어진 광기나 우연으로 본다. ‘근거가 약하다’는 점에서 박 대통령은 2008년 광우병시위와 유사하다고 했다. MBC의 의도적이고 부정확한 광우병 괴담 프로그램으로 촉발돼 집단광기로 폭발한 광우병시위가 진짜 촛불시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지, 뉴욕타임스가 사이비종교 같다(cultlike)고 표현한 태극기시위와 유사한 건 아닌지 이젠 말하기도 겁난다. 나와 견해가 다르면 적, 아니면 바보 또는 종북 좌빨로 모는 광기의 분위기 때문이다.

누가 맞는지 시시비비를 따져 공동체의 분란을 해소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법의 존재 이유다. 정치제도의 발전도 종종 우발적, 우연적 사태에 좌우된다. 저마다 진실을 주장하는 ‘포스트 진실’의 시대, 우리에게 헌법재판소가 있어 참 다행이다 싶다. 작년 12월 국회가 박 대통령을 탄핵소추하지 않았더라면 “대통령 물러나라”는 외침은 지금쯤 더 크고 거칠어졌을 게 틀림없다. 법과 제도에 따라 우리는 탄핵 절차를 밟았고, 이제 헌재의 결정대로 따르면 이 참담한 사태도 끝나는 거다.

적잖은 이들이 탄핵 이후를 걱정하지만 광기와 우연의 역사가 축복이 될 수도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사적(私的) 인정(人情)에 의한 정치(patrimonialism·가산제)를 넘어서는 것이 정치 발전이고, 권력이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것이 정치 후퇴라고 했다. 이번 사태를 겪고도 사적 측근에 의존하는 정치인은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헌법정신을 훼손하는 대통령이 다신 나올 수 없게 된다면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다.

마침 대통령 측 김평우 변호사가 “무조건 헌재 결정에 승복해야 된다고 한다는데 지금이 조선 시대냐”라고 주장했다. 말씀 한번 잘하셨다. 조선 시대가 아니니까 승복하라는 거다. 임금도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법치주의이고, 대통령마다 법을 어겨 불행한 결말을 맞은 것이 우리나라다. 아무리 인정하기 싫은 헌재 결정이 나와도 대통령부터 차기 대선 주자들까지 마음으로부터 승복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2004년 5월 14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헌재에서 기각됐을 때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헌재의 결정을 존중하고 그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헌재 결정을 겸허히 받아들이지 않은 쪽은 오히려 노무현이었다. 다음 날 발표한 ‘업무 복귀에 즈음하여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에는 눈을 씻고 봐도 헌법과 법률 위반에 대한 사과가 없다. ‘탄핵에 이르는 사유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정치적 도의적 책임’은 있다며 대선자금과 측근의 과오만 자신의 허물이라고 사죄했을 뿐이다.

당시 헌재는 “노 대통령이 일부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파면할 만큼 중대한 위반은 아니다”라고 탄핵을 기각했다. 그러면서도 “대통령은 국민 모두에 대한 ‘법치와 준법의 상징적 존재’이므로 대통령 스스로 법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도 법의 준수를 요구할 수 없다”고 분명히 경고했다. 그때 헌재가 엄격한 결정을 내렸다면, 대통령이 ‘그놈의 헌법’ 운운하지 않았다면, 헌법을 가벼이 여기는 대통령이 나올 수 있었을까.
  
김순덕 논설주간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