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습의 시대’ 펴낸 이수명 시인… 1990년대 시 문학사 본격 조명
시인이자 평론가인 이수명 씨는 24일 “1990년대 시인들은 이전 시대 거인들의 그림자와 대결하며 미시적 세계를 창출했고, 그 고투가 새로운 세기의 시와 문화에 스며들었다”고 말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벌판 한군데 눈이 꿈틀거리더니/새가 움터 날아오른다/그 자리가 뻥 뚫린다/…/뻥/뻥/뻥/뚫린다’(황인숙 ‘봄’에서)
각각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1988년)와 ‘슬픔이 나를 깨운다’(1994년)에 실린 시다. 발간 시점은 불과 6년 차이지만 두 시구 사이의 거리는 아득하다. 새가 ‘붉은 해’를 내려놓고 ‘뻥뻥’ 자국을 남기며 발랄하게 날아오르는 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1980년대는 민중시와 실천을 중시하는 리얼리즘 시가 지배적이었다. 이 씨에 따르면 억압적 세계와 맞서 시로 투쟁을 벌인 ‘거인’들의 시대다. 21세기는 정체성과 고정된 의미를 거부하는, 부유하는 ‘유령’들의 시대다. 1990년대는 거인과 유령 사이에서, 이도저도 아닌 것으로 치부돼 왔다. 1990년대의 특정 시인이나 경향에 집중한 부분적 연구는 있었지만 주요 시인들을 통해 시대의 정수를 분석하고 제시한 책은 찾기 힘든 것도 이 때문으로 분석된다.
“그날 아침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우체국 뒷길을 맴돌다/수채구멍 속에서 나온/개구리 한 마리를 밟아 죽이고/집으로 돌아왔습니다/…/그리고 나는 불을 질렀습니다”(박상순,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4년 뒤’에서)
책은 1990년대 초반 발표된 이 시가 개인과 공동체와의 긴장을 표현한 것이라고 봤다. 이 씨는 “정치적 해방으로 개인이 자연스레 출현했다는 인식은 2000년대의 상황을 근거로 막연히 역산한 것에 불과하다”며 “시인들은 공동체의 억압적 측면과 대결하면서 지금의 개인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이 밖에 자유로운 발화(진이정 시인), 세계나 체제로 묶이지 않는 발랄한 감각(황인숙), 중심에 복속되지 않는 인식(최정례) 등이 조명된다. 시인들은 점조직처럼 움직였고, 전투는 고독했다는 게 이 씨의 말이다. 실제로 책이 다루는 13권 시집의 시인들은 대체로 낯설다. 김기택 함성호 황인숙 시인을 제외하면 장경린 노태맹 김언희 함기석 강정 서정학 허연 등 지금까지 비교적 덜 주목받은, “그 가치만큼 평가받지 못했던”(이수명) 이들이 대부분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