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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D]러 대사 암살한 터키 경찰관 패션이 멋있다고?

입력 | 2016-12-28 11:32:00

이제는 초현실의 세계를 준비하세요
박세회의 Outsight/Infight




12월 19일 오후 수도 앙카라의 한 사진전에서 안드레이 카를로프 터키 주재 러시아대사를 저격한 터키 현직 경찰관 메블뤼트 메르트 알튼타시. / AP 뉴시스



터키의 수도 앙카라의 한 미술관에서 ‘여행자가 본 칼리닌그라드에서 캄차카까지’라는 사진 전시회가 열렸다. 제목은 정직했다. 터키인 사진가들이 러시아 전역, 극서의 칼리닌그라드부터 극동의 캄차카까지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이 전시됐다. 후원은 주터키 러시아 대사관의 몫이었다. 후원자 대표로 안드레이 카를로프 러시아 대사가 축사를 맡았다. 두 나라의 우호적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전시라 그리 큰 예술적 의미가 있는 행사는 아니었다.

AP통신의 사진기자 버르한 오즈빌리치(Burhan Ozbilici) 역시 이 전시 자체를 보도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향후 터키와 러시아 관계에 대한 기사에 사용할 자료사진을 건지기 위해’ AP통신의 앙카라 사무실로 복귀하던 도중 잠시 들러 몇 장 찍기로 했다. 축사를 전하는 안드레이 카를로프 러시아 대사의 뒤에 검은 양복을 차려입고 편안한 자세로 서 있는 현직 경찰 메블뤼트 메르트 알튼타시를 딱히 눈여겨보지 않았다. 현장에 있던 모두는 그가 당연히 경호원이라고 생각했다.

알튼타시는 축사가 시작된 후 편안한 자세로 주변을 서성이더니 가슴팍에서 피스톨을 꺼내 러시아 대사의 가슴팍을 쐈다. 오즈빌리치는 나중에 이 장면을 회상하며 이렇게 썼다. ‘공연 예술인 줄 알았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벽 뒤에 숨어 손가락을 세우고 ‘알레포를 잊지 말라’라고 외치는 살인자의 모습을 찍었다. 2016년 12월 20일 일어난 일이다.

공교롭게도 전날인 12월 19일 메리엄-웹스터 사전은 2016년을 대표하는 단어로 ‘Surreal’(쉬르리얼, 쉬르레알 또는 서리얼로 읽는다)을 선정했다. 보통 예술 사조 ‘쉬르리얼리즘’을 말할 때 들어가는 바로 그 단어다. 다만 일상에서 쉬르리얼은 종종 ‘초현실적인’ ‘환상적인’ ‘믿을 수 없는’의 의미로 쓰이는데, 종합하면 ‘너무도 비이성적이어서 꿈이었으면 싶을 만큼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 정도가 되겠다. 오즈빌리치의 렌즈에 비친 알튼타시의 모습,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 미국의 트럼프 당선이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쉬르리얼’이다. 메리엄-웹스터는 그 근거로 브렉시트가 결정되고 트럼프가 당선됐을 때, 테러가 일어날 때마다 이 단어를 검색하는 빈도가 늘었다고 발표했다.

‘쉬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의 정의에 ‘이성에 의한 통제가 부재하는’이라는 구절이 들어가 있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예술과 사회를 일대일로 비교할 순 없지만, 쉬르리얼의 시대에 ‘이성보다 감정’이 중요하다는 건 사실이기 때문. 메리엄-웹스터가 발표하기 조금 전, 옥스퍼드 사전은 올해의 단어로 ‘포스트-트루스(Post-Truth)’를 선정했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탈진실’ 정도가 될 이 단어는 ‘객관적인 사실이 감정에의 호소나 개인적 신념보다 여론을 형성하는 데 힘을 덜 미치는 상황’을 의미한다.

CNN은 5명의 기자를 투입해 1만2000 단어, 약 한 시간짜리 도널드 트럼프의 인터뷰를 검증한 바 있다. 그 결과 그는 한 시간 동안 71번, 1분에 1.16번꼴로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그의 거짓말이 당선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건 뭐 다들 아는 사실이다.

영어권에서 선정한 올해의 단어 리스트에 트럼프와 관련된 게 많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초이성 사회’의 수장인 도널드 트럼프가 즐겨 쓴 ‘비글리’(bigly)라는 단어 역시 올해의 단어 후보에 들어갔다. 이 단어는 지난 9월 트럼프가 TV토론 중에 "나는 세금을 광범위하게(bigly) 내리고, 당신(힐러리)은 세금을 광범위하게 올린다"고 말해서 유명해졌다.

미국인들도 세상에 그런 단어가 있는지 몰랐다는 ‘비글리’는 형용사(big)에 접미사 ‘-ly'를 붙여서 부사를 만드는 법을 갓 배운 초등학생들이 주로 사용한다. 초등학생도 고학년이 되면 잘 쓰지 않는 단어라 다들 잊어버렸던 것. 이에 당시 트럼프 캠프의 대변인 호프 힉스는 트럼프가 사용한 단어가 ‘bigly’가 아니라 ‘big league’(이 역시 ‘광범위하게’라는 의미로 쓰인다)라고 공식 입장을 발표했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트럼프는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이 단어를 썼지만, 이 역시 당선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다.

트위터 등에서 “‘비글리’라는 단어는 사전에도 등재됐다”며, 배운 척하는 속물 언론들이 트럼프를 끌어내린다고 화를 잔뜩 낸 사람들의 중심엔 ‘알트 라이트’(대안 우파, Alt-right)가 있다. 역시나 옥스퍼드와 메리엄-웹스터 사전 모두가 올해의 단어 후보로 꼽았던 ‘알트 라이트’를 정의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인터넷 게시판에서 익명성의 그늘에 숨어 활동하던 이들은, 대략 백인지상주의자로 이슬람과 유대인, 중남미 이민자를 증오하고, 성 소수자를 혐오하며, 남성 우월주의적 성향을 띤다.

재밌는 건 이 알트 라이트들이 오히려 세상에서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자기들뿐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빨간 알약을 삼킨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빨간 알약이란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내미는 진실의 알약을 뜻한다.

박세회 허핑턴포스트 코리아 뉴스 에디터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빨간약을 먹고 깨달은 진실이란 무엇이냐? 무슬림과 중남미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빼앗고, 정부가 여성을 위한 과도한 우대정책을 펼치고, 돈 많은 유대인이 모든 걸 차지하고, 게이들도 결혼하는 미국에서 막상 세계의 주인인 백인 남성들이 오히려 차별을 당한다는 ‘진실’이다. 농담 같겠지만, 트럼프 당선을 전후해 이들의 존재는 무척 커졌다. AP통신의 기사 작성 지침을 총괄하는 존 다니주스키 부사장이 지난 11월, 기자들에게 “‘알트 라이트’라는 단어가 백인 우월주의의 완곡한 표현으로 쓰이지 않도록 구분을 명확히 하고 주의를 기울이라”고 당부했을 정도다.

지금 머릿속에 ‘한국이랑 비슷하네’라는 생각이 떠오른 건 자연스러운 연상작용이다. 세상은 ‘비글리’하게 움직이는 법이니까. 아직 우리는 광화문 광장에서 거짓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나 조만간, 진실이 거짓을 이기기 버거운 세계에선 빨간약을 먹은 네오들이 다수고, 다수가 곧 진실이라는 초현실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 참고로 알트 라이트들이 주로 활동하는 게시판에선 러시아 대사를 암살한 터키 경찰 알튼타시의 슈트 패션이 꽤 큰 화제가 된 바 있는데, ‘멋있다’는 댓글이 주를 이뤘다.

박세회 허핑턴포스트 코리아 뉴스 에디터 rapidmove81@hotmail.com

*연예, 음악, 영화, 섹스의 영역에서 정치와 사회적 이슈를 읽는 데 관심 많은 그냥 사람. 가장 좋아하는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 생일이 같은 선택 받은 팬이자, 가장 좋아하는 밴드 틴에이지 팬클럽의 한국 수행을 맡았던 성공한 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