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아닌/황정은 지음/216쪽·1만2000원/문학동네
‘상류엔 맹금류’는 옛 연인 제희와 그의 부모와 함께 수목원으로 나들이를 갔던 일을 회상하는 화자의 이야기다. 사랑이 없었던 가정에서 자라난 ‘나’는 가난하지만 다정해 보이는 제희의 가족들이 부럽다. 그러나 제희의 아버지가 폐암으로 한쪽 폐를 들어낸 뒤 후유증으로 고생하면서, 어머니와 누나들이 아버지 뒷바라지로 지쳐가면서, 다감했던 가정은 서서히 무너진다. 제희의 부모가 느닷없이 제안해 제희와 화자가 동행한 수목원 나들이는 그 절정이다. 제희 어머니는 “생일이라고 빵 한 덩어리 받은 적 없다”며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하고,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멋쩍게 웃기도 하는데, 어느 것 하나 어색하지 않은 게 없다.
황정은 씨는 실제적 빈곤의 문제를 공포에 가까운 감성과 교직해 낸다. ‘상류엔 맹금류’에서 제희의 부모는 큰 빚을 지고도 도망가는 대신 가족이 다 함께 가난을 나누기를 택하고 가족의 정으로 어려움을 보듬으려 하지만 경제적 근심도, 그로 인한 마음의 고통도 어느 것 하나 극복할 수가 없다. ‘양의 미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하에 있는 서점에서 근근하게 아르바이트를 하는 화자의 나날들을 그린 작품이다. 황 씨는 화자가 실종돼 버린 소녀에 대한 목격담을 독자들에게 들려주게 함으로써 미래가 없는 화자의 삶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김지영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