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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전승훈]‘헬조선’과 ‘국뽕’의 사이에서

입력 | 2016-09-07 03:00:00


전승훈 문화부 차장

“엄마, 나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지난주 벌초를 다녀오면서 고교생 조카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깜짝 놀라서 귀를 기울이니 어느 대학에 들어갈지, 어떤 직장에 취업할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도대체 알 수가 없어서 고민이란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더. “헬조선에서 살기 싫어요.”

인터넷에서 유행한다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헬조선’(지옥 같은 한국)이란 신조어를 조카의 입을 통해 듣게 되다니…. 취업난을 겪는 20, 30대 청년세대들이 쓰던 말을 이제는 10대 고교생들도 “역시 헬조선은 안 돼” 하면서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형국이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에 불과 10∼20%를 살아보고 ‘이번 생은 망했다’고 말하는 것은 충격적이다.

‘헬조선’은 2010년 1월 디시인사이드의 한 갤러리에서 친일 성향의 누리꾼들이 쓴 ‘헬조센’에서 시작된 말이라고 한다. 처음엔 ‘조센징’ ‘엽전’ ‘민도(民度)가 낮다’ 등 일제가 조선인을 비하했던 말을 연상시켜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등을 겪으면서 ‘헬조선’이 점점 설득력을 얻더니 이제는 영화 소설 등 대중문화 전반의 코드로 자리 잡았다.

1200만 관객 기록을 눈앞에 둔 영화 ‘부산행’은 달리는 KTX에 수백 명의 좀비가 달려드는 아비규환 같은 지옥도를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영화 ‘터널’도 세월호 사고로 무너져 내린 재난 같은 한국사회를 은유했다. 반면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한 군인들을 그린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국뽕’(과도한 애국주의) 논란에 휩싸였다.

출판시장에서도 젊은이들은 더 이상 ‘멘토’를 찾으러 다니지 않는다. 장강명 작가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에서 20대 여주인공은 불행하다는 생각이 드는 한국을 아예 떠난다. 주인공은 자신이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한테 늘 잡아먹히는 톰슨가젤 같은 존재”라며 “잡아먹히기 전에 도망치고 싶다”면서 호주로의 이민을 선택한다.

3년간의 파리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지가 두 달 정도 지났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대부분 묻는 것은 비슷했다. “지옥으로 돌아온 기분이 어때요?” “아이는 유럽에 두고 왔나요?” 아이를 데리고 왔다고 하면 “왜 그랬느냐”며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유럽도 옛날의 유럽이 아니다. 현재 유럽의 청년 4명 중 1명이, 그리스는 2명 중 1명이 실직 상태다. 프랑스 대학생들이 한국에 취직하고 싶어 한국어 강좌에 몰려든다는 이야기를 해도 아무도 믿지 않는 눈치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각국의 청년들은 큰 아픔을 겪고 있다. 그리스에서는 사회안전망이 무너지고, 파리에서는 잇따른 테러 위협에 시내 곳곳에서 몸수색을 당해야 하는 불안감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도 유럽에선 ‘헬프랑스’나 ‘헬그리스’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테러 때마다 온 도시가 대형 국기의 물결로 뒤덮인다. 우리 같으면 ‘국뽕’ 논란이 벌어질 상황이다.

과연 세계에서 어느 나라가 더 지옥일까. 절대적 기준은 없을 것이다. 경제적 통계보다는 사회적, 심리적 요인이 더 커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자기 비하’ 세대에 일침을 가했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 당시 ‘꿈은 이루어진다’고 외쳤던 젊은이들의 함성이 왜 그토록 빨리 사라지고 ‘헬조선’이 득세하게 됐는지 정치권은 먼저 깊이 반성해야 한다. “특혜만 있고 책임을 지지 않는 천민적인 지도층이 헬조선을 만들었다”는 송복 교수의 말처럼 사회 지도층부터 도덕성 회복과 희생의 리더십이 필요한 때다.
 
전승훈 문화부 차장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