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화합-공생하는 인간을 통해 삶의 다양성 모색
레슬리 마몬 실코는 자신의 소설 속 주요 인물처럼 순수 인디언 혈통이 아닌 백인과 인디언의 피가 섞인 후손이다. 푸에블로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성장한 그는 뉴멕시코대 졸업 후 1969년 단편소설 ‘토니 이야기’로 데뷔했다. 1977년 발표한 첫 장편 ‘의식’(사진)은 ‘미국의 지성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반성케 하는 텍스트’ 또는 ‘인간과 자연의 생태를 생각하게 하는 텍스트’로 평가받았다.
백인과 인디언의 혼혈인 레슬리 마몬 실코는 소설에서 백인 위주의 사회를 비판하기보다 백인과 인디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분열과 파괴로 이끄는 사회에 문제를 제기한다. 동아시아 제공
그중 대표작으로 꼽히는 ‘의식’은 혼혈이라는 모호성의 문제를 인종을 초월한 인류애와 자연에 비추어 파고든 소설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의 투병과 치유 과정에서의 사실주의적 묘사, 푸에블로 부족의 신화를 비롯한 과거의 제식, 구전 전통의 필요성을 ‘분방하게 뒤섞는’ 방법으로 서술되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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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의 불가분의 관계는 백인 식민주의의 수탈과 가족 해체의 아픔을 그린 ‘모래언덕 위의 정원’에도 곳곳에 나타나 있다. 예를 들어 인공정원을 만들기 위해 숲에서 파헤쳐진 나무들이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것을 ‘나무의 신음소리’ 혹은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실코가 소설을 통해 제시하는 것은 삶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모든 자연의 움직임과 생명은 인간과 분리될 수 없으며 자연 속에서 인간의 모습이 조화롭게 존재하는 것이 인류 생존의 한 정점이라는 것이다.
실코의 작품은 인디언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내세우거나 인디언 문화와 백인 문화의 차이를 비교 대립시키기 전에, ‘보다 자연에 가까웠던 인디언 전통의 삶’이 근대 산업사회의 삶과 대조로서 남아있음을 드러낸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작가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억압과 수탈의 종식은 물론이고 소수 인종과 약자에 대한 강자의 지배와 수탈의 종식을 요구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백인에게 자연과 인디언은 증오와 수탈의 대상이지만 자연을 인간으로, 인간을 자연으로 묘사함으로써 백인과 인디언의 삶을 탈경계와 공존이라는 ‘관계 회복’으로 도출해 내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를 인간과 자연의 공생이라는 측면으로 볼 때 ‘나무를 꺾으면 나무에 깃든 생명이 피를 흘리며 슬퍼한다’는 박경리 문학의 생명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 레슬리 마몬 실코는…
레슬리 마몬 실코는 1948년 미국의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에서 태어났으며 정부 지정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자라났다. 한때 법학을 공부하기도 했던 그는 장편 ‘의식’으로 문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소설가로 혜성처럼 떠올랐다. 시인이기도 해서 아름다운 서정시에 전통적인 인디언 설화를 담은 작품들로도 잘 알려졌다. 실코는 아메리카 인디언 문학의 르네상스를 선도하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다른 소설로는 ‘이야기꾼’, ‘죽은 자의 책력’, ‘성수’, ‘모래언덕 위의 정원’ 등이 있다. 국내에는 ‘의식’이 번역 출간됐다.
이세기 소설가·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