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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인 컬처]여성-약자에겐 뻣뻣, 강자 앞에선 굽실… 그대 이름은 ‘개저씨’

입력 | 2016-02-03 03:00:00

‘개저씨’라 불리는 한국의 중년 남자들





《 할리우드에 ‘맨 인 블랙(Man in Black)’이 있다면, 한국에는 ‘맨 인 컬처(Man in Culture)’가 있다. 2016년 2월 3일. 한국에 ‘맨 인 컬처’가 도착했다. 같은 지구인이 봐도 이해하기 힘든 한국의 문화현상, 그리고 인간들을 심층 조사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혹여나 외계인이나 외계문명의 산물은 아닌지 알아볼 작정이다. 우리의 가슴은 뜨겁되 머리는 차가울 것이다. 발상은 유치하되 현실 감각은 딱딱할 것이다. 에이전트 5(김윤종 기자) 에이전트 7(임희윤 기자), 동시 출격! 》


서울 종로3가 선술집에서 만난 30대 직장인 여성들은 ‘개저씨(Gaejeossi)’를 연발하며 화를 내고 있었다.

“김 부장이 오늘 뭐랬는지 알아? ‘회사에 문제 생기면 직장맘들이 가정 버리고 최전선에 나설 수 있지? 못한다고? 그러면 내가 남자를 선호하겠냐, 여자를 선호하겠냐. 답이 딱 나오지?’ 아우, 개저씨….”

개저씨? 의아했다. ‘아저씨’는 멋들어진 중·장년 남성이 아닌가. 그 푸근함과 자상함, 불의를 응징하는 원빈이랑 리엄 니슨…. 그런데 개저씨라니.

개저씨는 ‘개 같은’의 ‘개’와 ‘아저씨’를 합친 신조어란다. 안하무인의 중년 여성이 ‘아줌마’, 허영심 강한 젊은 여성이 ‘된장녀’ ‘김치녀’로 비하되는 것처럼.

○ 개저씨는 외계인?

개저씨는 누굴까? 조사업체 엠브레인과 지난달 21∼24일, 20∼40세 여성 921명을 설문조사했다(표 참조). 40대∼60대 초반, 지나치게 권위적이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반칙을 일삼는 한편, 여성과 사회적 약자에게 강하지만 강자에겐 약한 이로 압축됐다. “‘오징어는 여자가 찢어야 맛있죠.’ 얼마 전 유명 남자 배우 A가 술자리에서 한 말이에요. A는 서른다섯 살. 생각이 그 모양이면 20대라도 개저씨죠.”(B일간지 기자 이모 씨) “사회적 지위, 교육 수준도 상관없는 것 같아요. 정치인 김무성 씨도 대표적인 개저씨 이미지죠. 아무한테나 반말 찍찍 하잖아요. 2011년 김준규 검찰총장은 대학 특강에서 ‘남자 검사는 집안일 포기하고 일하는데, 여자 검사는 일 포기하고 애 보러 간다’고 했죠.”(30대 직장인 박수진 씨)

최근 구세웅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가 영문 뉴스 사이트에 기고한 글 ‘Gaejeossi Must Die’(개저씨는 죽어야 한다)도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마초, 부성, 연장자 숭배 사상이 맞물렸을 때, 한국은 이를 오랫동안 ‘벼슬’이라고 생각해 왔다….’

○ 개저씨, 꼰대 2.0

21세기 개저씨는 20세기 ‘꼰대’와 비슷하지만 겹치지 않는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말한다. “개저씨들의 훈계와 조언은 더 쉽게 우스워집니다. 정보기술(IT) 혁신과 매체 다변화로 사회가 예측 불가능해졌거든요. 기성세대가 경험으로 습득한 삶의 원칙, 그들이 가리키는 하나의 방향에 대해 젊은 세대는 잘 납득하지 못합니다.”

서울 서교동에서 만난 음반사 대표 김연구(가명·45) 씨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때만 해도 공공장소에서의 음주, 흡연이 당연했어요. 진보적인 대학생 사이에서 심지어 그건 ‘멋’이었다니까요. 슬픈 종족일지 몰라요, 개저씨란….”

프리랜서 안선영(가명·34) 씨는 이런 추론을 펼쳤다. “‘쩍벌’은 어때요? ‘여자라면 무릎을 모으고 앉아야 한다’는 지침의 반대편. 나이 들고 남성 호르몬 줄고 사회 입지 축소된 개저씨들이 남성성 증명하려는 잠재적 행동은 혹시 아닐까요.”

○ 나는 개저씨가 싫어요, 차라리 ‘아재’가 될래요

조사 도중 우리는 아저씨 가운데 존재하는 다른 이들, ‘아재’라 불리는 종족을 만났다. 그들의 다이어트와 피부 관리는 ‘개저씨’가 안 되려는 애처로운 몸부림으로도 보였다. 방송인 유재석(45)을 모델로 애교 개그를 연습하는 이태성 씨(43)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억울한 도형이 뭐게요? 원통! 맥주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은? 유언비어∼. 웃기죠. 재치 있는 아저씨가 되고 싶어서 연마 중이에요. 아재 개그.”

광고 시장도 움직였다. 한 의류 광고. 20대 무리가 화면 밖으로 ‘아저씨’를 외친다. 그러자 세련되게 차려입은 40대 이정재가 나타난다. 20대들. 홍해처럼 갈라지며 선망의 눈빛 보낸다. 이정재는 이렇게 외친다. “Awesome Forty(죽이는 40대)”.

엠브레인이 여성 921명 설문조사(1월 21~24일) 분석.

○ 에이전트 7, 코호트를 아는가

우린 이론적 분석을 원했다. 개저씨 논란의 근간에 ‘코호트 효과(Cohort effect)’가 작용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코호트’란 출생연도 기준 10년 단위로 특정한 경험을 공유하며 연대를 느끼는 집단을 말한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를 만났다. “40, 50대는 노력으로 얻은 성취의 경험을 갖고 있죠. 요즘 젊은이들은 기회 자체가 적어요. 집단주의 속에서 자란 아저씨들의 행태는 무례하거나 남에게 개입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세대 간 이해와 상호 존중을 모색할 시점입니다.”

존경할 만한 어른에 대한 갈망이 역설적으로 개저씨란 말을 유행시키지는 않았을까. “영화 ‘인턴’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옷을 잘 입어서 멋진 줄 아세요? 소통도 잘하고 뭔가 나이에 맞는 품격이 있는 진짜 어른 같잖아요.”(대학원생 정희영 씨·28)

개저씨 담론의 출현을 보며 또 다른 희망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까. 이것은 한국사회 한 챕터의 끝이 될 수도. 즉, 가부장과 남아 선호, 집단주의와 위계질서 중심 사회와의 작별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개저씨는 외계에서 뚝 떨어진 별종이 아니었다. 내 친구의 아버지, 내 어머니의 옛 연인. ※결론: 개저씨=지구인

한편 지하철에서 두 요원은 가수 설현의 이상한 광고 포스터를 발견하는데…. (다음 회에 계속)

임희윤 imi@donga.com·김윤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