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경북 고령군의 한 주택에 압수수색을 하기 위해 들이닥친 대구지검 서부지청 수사관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안방에 비치된 바구니 안에선 A 씨(41)와 B 씨(48·여)가 일본 도쿄 디즈니랜드와 중국 만리장성을 배경으로 다정하게 찍은 사진 10여 장이 발견됐다. 두 남녀의 사진이 각각 붙어있지만 실제 이름과는 다른 가짜 여권 2개를 복사한 종이도 함께 담겨있었다.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하는 19년 전 살인사건 범인을 법의 심판대에 세울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
●사랑 때문에 사람을 죽이다
“이혼해!”
광고 로드중
범행 직후 A 씨와 내연녀 B 씨는 ‘사랑의 도피’를 떠났다. 이들은 16개월간 경북 경주, 전북 군산, 인천 등 국내를 떠돌다가 위조여권을 사서 1998년 4월 1일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출국했다. A 씨는 4년여 동안 일본 빠찡코에서 승률 높은 자리를 손님에게 알선해주는 브로커를 하며 1억 원 가까이 돈을 모았다. 도쿄 디즈니랜드 관광을 다녀올 만큼 일상의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일본 전역에서 검문검색이 부쩍 철저해졌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이들은 또다시 위조여권을 구입해 중국 상하이로 도주했다. 중국에서의 생활은 일본과 달리 팍팍했다. A 씨는 트럭에 야채를 실어주는 일을 했고, B 씨는 공장에 나가며 근근이 생계를 연명했다. 그래도 이들의 사랑은 여전히 불타올랐다. 어려운 와중에 짬을 내 만리장성을 구경 다녀오기도 했다.
●19년 만에 당당히 자수한 살인범
A 씨와 B 씨는 도피생활이 10년을 넘어서자 한국에 대한 향수가 커졌다. 이들은 1996년 12월 8일 저지른 살인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15년)가 2011년 12월 7일부로 끝났다고 판단해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광고 로드중
결국 이들은 살인죄 공소시효가 지나 한국에 들어가도 처벌받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자수라는 초강수를 택했다. 2015년 11월 주상하이 총영사관을 찾아가 “한국에서 중국으로 밀항한 불법 체류자인데, 자수할 테니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말했다. 중국 공안에 인계돼 2개월여 동안 조사를 받으며 귀국이 지연되자 “어서 한국으로 보내 달라”며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A 씨는 지난해 12월 30일, B 씨는 이달 6일 각각 중국에서 추방돼 인천공항을 통해 한국에 돌아왔다. B 씨 남편을 살해하고 도피한지 19년 만이었다.
검경은 이들의 밀항 동기를 조사하다가 B 씨 남편이 사망한 사실을 확인했다. 사건 당시 남편 시신에서 발견된 유전자(DNA)가 A 씨와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A 씨는 살인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공소시효(15년)가 지났으니 처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범인이 해외로 도피하면 그 순간부터 공소시효가 중지되지만, A 씨의 경우엔 밀항했기에 언제 중국으로 도주했는지 알 방법이 없어 공소시효를 따져보기가 애매했다.
●결정적 증거가 된 ‘사랑의 추억’
A 씨와 B 씨는 공소시효가 모두 지날 때까지 한국에 숨어살다가 2014년 4월에야 중국으로 밀항했다고 주장했다. 둘 다 계좌거래나 의료보험, 전기·도시가스 가입 내역이 전혀 없어 한국에서 살았다고 보기 어려워보였지만 이를 반박할 증거가 없었다. 이들은 도피 행적에 대해선 철저히 묵비권을 행사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들의 의도대로 공소시효가 끝난 것으로 처리돼 범인이 죄를 자백하는데도 처벌하지 못하는 처지가 될 터였다.
광고 로드중
검찰은 22일 B 씨 친언니 자택을 압수수색해 A 씨와 B 씨가 일본과 중국 등 해외에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했다. 일본과 중국으로 사랑의 도피를 벌이면서 디즈니랜드나 만리장성 등 유명 관광지에서 다정하게 찍은 사진 10여장이었다. 사진 뒷면엔 ‘2000년 몇월 며칠’ 식으로 촬영일자가 적혀있어 당시 해외에 있었다는 게 명확히 입증됐다. A 씨의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다시 유효해진 순간이었다.
이 사진들은 A 씨와 B 씨가 2013년 중국 청도를 찾아온 B 씨 친언니에게 ‘귀국을 준비하면서 살림살이를 정리하는데 이것만큼은 아름다운 추억이라 차마 버릴 수 없으니 잘 간직해 달라’며 건넨 것으로 조사됐다. B 씨 친언니 자택에선 A 씨와 B 씨가 1998년 일본 밀항 시 썼던 위조여권 2개 복사본, 당시 위조여권에 쓴 증명사진도 함께 발견됐다. 국내외 도주 행적을 세밀히 적어둔 메모지도 있었다.
묵비권으로 일관하던 A 씨와 B 씨는 검사가 명백한 증거인 사진을 내밀자 체념하고 모든 걸 자백했다. 따로 격리돼 조사를 받으면서 B 씨가 먼저 죄를 자백했다. 이들은 나란히 구속돼 대구교도소에 수감돼있다.
대구지검 서부지청(지청장 장영수)는 살인, 사체유기, 여권위조 혐의 등으로 A 씨를 구속 기소했다고 27일 밝혔다. B 씨에 대해선 살인에 가담했는지 등을 보강 조사해 곧 재판에 넘길 예정이다. 검찰 관계자는 “피의자들이 묵비권으로 일관할 땐 막막했지만 이들이 사랑의 추억으로 간직하려고 버리지 않고 간직한 사진을 결정적 단서로 삼아 처벌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조동주 기자 dj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