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추상을 구체화한 대표적인 사례는 질병이다. 요즘은 광학기술과 미생물학이 발달해 질병의 원인이 되는 병원체의 모습을 눈으로도 생생히 확인하는 시대다. 세균은 물론이고 에볼라나 메르스 바이러스처럼 크기가 극히 작은 대상도 전자현미경으로 또렷이 포착한다. 하지만 불과 200년 전만 해도 불가능했던 일이다. 보기는커녕 존재도 몰랐다. 1840년대에 영국의 역학자 윌리엄 파는 콜레라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런던의 평균 기온과 사망자 수 사이의 관계를 구했다. 콜레라가 나쁜 기운(오염된 공기) 때문에 걸린다고 생각하고 기온에 따른 템스 강의 수분 증발량과 관련을 지어 보려 한 것이다.
이렇게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병은 은유가 될 강력한 압력 아래에 있었다. 미국의 평론가 수전 손태그는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난치병은 곧잘 신학적인 은유를 띤다고 지적했다. 병은 사람에 대한 신의 응징이거나 인류를 향해 진군하는 악이었다. 대상이 악이면 사람으로선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 일본의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병과 싸운다’는 것은 병이 마치 작용하는 주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간주하는 말투”라고 지적했다(‘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 질병은 추상이었는데 마치 뭔가 구체적인 존재처럼 취급되게 됐다. 이 지적은 지금도 유효해서 우리는 지난 한 달 동안 각종 뉴스에서 메르스와 맞서 싸우는 내용의 기사를 수도 없이 봤다.
수사적인 은유보다는 병원체에 대한 연구가 중요하다. 물론 그 목적이 병원체 자체를 때려잡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이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병원체의 전파 특성을 알고 선호하는 주변 환경을 파악해 병의 유행을 차단해야 한다. 19세기의 콜레라는 콜레라균을 잡아 없애서가 아니라 전파원인 우물을 관리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었다.
1930년대에 태어난 손태그의 시대에 대표적인 난치병은 결핵과 암이었다. 오늘날 결핵은 이전보다는 많이 사라졌고 암이 질병계의 ‘은유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에볼라와 메르스가 창궐한 최근에는 감염병이 그 자리를 꿰어 찰 기세다. 그런데 요즘 결핵이 다시 심상치 않다. 항생제라는 무기로 결핵균을 ‘격퇴’했더니 균이 항생제에 대한 내성으로 무장해 다시 돌아왔다. 다른 항생제를 썼더니 아예 여러 항생제에 견디는 다제내성균이 됐다. 속편마다 강해져서 돌아오는 터미네이터도 아니고 왜 이러는 걸까. 질병에 대한 ‘무력’ 경쟁은 옳지 않다는 은근한 은유가 아닐까.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ashill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