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때 징집피하려 태국行 이학래씨의 기구한 인생
1일 일본 도쿄 중의원 제2의원회관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한 이학래 씨. 그는 1942년 일제에 의해 연합군 포로 감시원으로 동원됐다가 전범의 멍에를 뒤집어 쓰고 한때 사형을 선고받았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1942년 6월 전남 보성군 경백면에서 농사를 짓던 이학래 씨(당시 17세)에게 면장은 이렇게 권유했다. 당시 일본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은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여차하면 일본군으로 끌려갈 수 있다고 생각한 이 씨는 결국 면장의 반강제적 권유에 이끌려 감시원으로 나섰다.
이 씨처럼 한국 전역에서 끌려온 3000여 명은 부산에서 두 달간 교육을 받은 후 태국, 말레이시아 등 남아시아의 연합군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태평양전쟁 당시 30만 명 가까운 연합군이 포로가 됐다. 예상치 못한 포로 수에 일본은 한국과 대만에서 포로 감시원을 급히 모집한 것이다. 이 씨는 태국∼미얀마 간 철도 건설 현장에 배치됐다.
지긋지긋한 전쟁은 1945년 8월에 끝났다. 하지만 이 씨 등 포로 감시원들은 고향이 아니라 감옥으로 끌려갔다. 전범 용의자로 체포된 것. 연합군 포로들은 명령을 내린 일본군 상관보다 말단의 한국인 감시원의 얼굴을 더 잘 기억해냈다. 이 때문에 포로 감시원 중 상당수가 각지의 전범 재판에서 B·C급 전범으로 선고됐다. 전범 재판에서 A급은 전쟁 주모자급이고, B급 혹은 C급은 전쟁 범죄나 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지칭한다.
한국인 중 B·C급 전범으로 선고받은 이는 모두 148명. 이 중 129명이 포로 감시원이었다. 23명은 사형을, 나머지 125명은 징역형을 받았다. 이 씨도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정신이 멍했다. 일본에 반강제로 연행돼 일본군이 시키는 일을 했는데 내가 왜 죽어야 하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씨는 태국과 도쿄에 있는 감옥에서 11년을 보낸 뒤 1956년 10월 감형돼 가석방됐다.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친일 반역자’란 낙인이 찍힐까 봐 일본에 눌러 앉았다. 일본 정부는 자국 전범에게는 매달 보조금을 줬지만 이 씨처럼 일본군에 부역했던 한국인들은 외면했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뭉치기 시작했다. 한국인 B·C급 전범 약 70명이 모여 1955년 4월 ‘동진(東進)회’라는 모임을 결성했다. 그러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과와 피해 배상을 요구하며 싸웠다. 그 사이 회원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이들은 이 씨를 포함해 5명뿐이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