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화학의 충북 오창공장에서 직원들이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부품을 살펴보고 있다. LG그룹 제공
1940년 구 창업회장은 ‘구인회 포목상점’이라는 간판 대신 주식회사 ‘구인상회’를 발족시켜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이어 1945년에는 부산에서 무역회사인 ‘조선흥업사’를 창업했다.
이후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화장품 크림 판매업을 하던 구 창업회장은 1947년 ‘락희화학공업’을 설립했다. LG그룹의 출발이다. 국내 최초로 자체 생산한 화장품 럭키크림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1958년 국내 최초의 전자업체인 ‘금성사’를 설립하는 등 구 창업회장의 사업 확장에는 거침이 없었다.
1970년 2대 회장에 취임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연구개발(R&D)을 통한 기술력 확보만이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늘 강조했다. 1975년 국내 민간기업 최초의 기술연구소인 LG전자 중앙연구소를 설립한 것도 그런 지론 때문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재임 기간에 국내외에 모두 70여 개의 기업연구소를 설립했다.
장자 승계의 적통을 이으며 1995년 3대 회장에 오른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경영 화두는 ‘도전’이었다.
“제가 꿈꾸는 LG는 모름지기 세계 초우량을 추구하는 회사입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남이 하지 않는 것에 과감히 도전해서 최고를 성취해야 하겠습니다.”
LG화학의 2차전지 사업은 구 회장이 1992년 연구개발을 제안한 뒤 20년 이상 R&D에 투자해 결실을 거두고 있는 사례다. 당시 부회장이었던 구 회장은 그룹의 미래 신성장동력 발굴을 위한 해외 출장에서 한 번 쓰고 버리는 건전지가 아니라 충전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2차전지를 처음 접했다. 사업 가능성을 높게 본 그는 계열사였던 럭키금속에 2차전지를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1996년 럭키금속의 전지 연구조직을 LG화학으로 이전했다.
물론 쉽지 않은 길이었다. 1997년에야 소형전지 파일럿 생산이 처음으로 이뤄졌지만 일본 선발업체들에 비해서는 기술 경쟁력이 한참이나 뒤처졌다. “사업을 접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불만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구 회장은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LG화학은 현재 전기자동차 배터리 및 에너지저장시스템(ESS)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오르는 등 2차전지 시장의 선도업체로 우뚝 섰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