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탐사기획 프리미엄 리포트/강경파의 나라] [강경파에 어떻게 휩쓸리나/토론 실험 해보니]
‘강경파 도우미’실험에 참여한 대학생 피험자들이 지난달 30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팀 실험실에서 담당 조교의 설명을 듣고 있다. 강경파 도우미(오른쪽 앞)는 시종일관 큰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만 주장하는 역할로 설정됐다. 곽도영기자 now@donga.com
9월 30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팀 실험실. 피험자로 모집된 대학생들은 주어진 그림을 보고 ‘①수다 ②관계 ③불만의 세 가지 제목 중 맞는 것을 추론하시오’라는 과제를 받았다. 그림은 세 여인이 테이블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전반적으로 평화롭고 다정한 분위기에 가까웠다. 그런데 각자의 의견을 말하자마자 한 학생이 다짜고짜 “이건 분명히 ‘불만’을 나타낸 것이다”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 ‘강경파 도우미’ 투입한 A그룹
A그룹엔 논리적 타당성과는 상관없이 시종일관 자신의 주장을 큰 소리로 반복하는 ‘강경파 도우미’가 투입됐다. B그룹엔 자신의 의견을 소극적으로만 밝힐 뿐 별다른 주장을 하지 않는 ‘온건파 도우미’가 투입됐다.
실험은 간단했다. 제목이 애매모호한 그림을 보여준 뒤 △그룹마다 개인의 최초 의견을 물어보고 △토론 이후의 의견을 다시 물어본 뒤 △마지막으로 자신이 결정한 답안을 종이에 써서 제출하게 했다. 실험의 목적은 그룹 중 한 사람이 소수 의견에 해당하는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우는 상황에서 각 구성원이 어떠한 태도를 보이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A그룹의 최초 의견에서 ‘불만’을 답으로 주장한 이는 도우미 혼자뿐이었다. 4명의 학생은 모두 ‘관계’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15분간 이어진 토론에서 도우미는 피험자들에 비해 강력한 말투로 “제가 미술사 쪽을 공부해서 아는데, 붉은색은 분노를 의미하는 것이다” “‘관계’라고 하면 너무 밋밋하지 않으냐” “내가 화가라면 그렇게 유치한 제목은 붙이지 않을 것이다” 등 강한 주장을 내비쳤다. 다른 이들의 대화를 중간에 자르고 끼어드는 등 발언 비율도 대부분을 차지했다.
피험자들의 대화 내용은 점차 바뀌어갔다. 초반 5분간은 “(그림이) 따뜻한 분위기에 가깝다” “소통은 잘되고 있는 느낌인데요?” 등의 발언이 오갔지만 도우미가 10분이 넘게 주장을 고수하자 “(그러고 보니) 약간 ‘왕따’ 된 것 같은 장면이기도 하네요” “그런가?” “불만이라는 제목을 주고 본다 해도 이상하진 않을 것 같네요”라는 식으로 동조하는 반응이 나왔다.
○ ‘온건파 도우미’ 투입한 B그룹
B그룹에서 도우미의 의견에 따라 태도를 바꾼 사람은 없었다. 토론이 진행될수록 오히려 ‘관계’를 주장하는 피험자 중 목소리가 크고 태도가 강경했던 사람에 의해 그룹 의견이 변화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해당 여성 피험자는 도우미가 아니었지만 적극적으로 주장을 펼치고 다른 피험자들에게 반박 질문을 던지는 등 B그룹 피험자 중에서 가장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다른 의견들에도 불구하고 해당 피험자가 토론 내내 의견을 고집하자 결국 최종 선택에서 ‘관계’를 택한 피험자는 도우미를 포함해서 4명(나머지 1명은 ‘불만’)으로 늘었다. 공개적인 그룹 의견도 ‘관계’로 제출됐다.
실험이 끝난 뒤 피험자들은 “한 명이 계속해서 강경하게 주장을 내세우는 경우 반박이 부담스러웠다” “발언 비중이 깨진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평가했다. 토론 중에 ‘강경파 도우미’에게 동조하는 발언을 했던 피험자들도 “솔직히 반발심이 들기도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곽도영 now@donga.com·이철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