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수 사회부 차장
자대 배치 후의 하루하루는 악몽 그 자체였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졌고 영문도 모른 채 거의 매일 매를 맞았다. 툭하면 ‘집합’이 걸렸다. 집합은 주로 선임하사가 퇴근한 뒤 늦은 저녁, 또는 새벽에 창고나 불 꺼진 식당, 초소 뒤에서 이뤄졌다. 병장→상병→일병→이병 순으로 차례차례 내려오는 집합이 끝나면 어느새 날이 밝아왔다. 만화같이 눈앞에서 ‘별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도 경험했다. 군홧발로 밟히고 귀싸대기를 하도 맞아 별을 본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축구를 하다 김 이병이 슛을 한 차례 날렸다. 전반이 끝나고 하프타임에 집합이 걸렸다. 선임병이 흥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야, 이 개××야. 너 미쳤어. 이병 놈이 어디서 슛을 해. 그건 병장들이나 하는 거야. 한 번만 더 그러면 정말 죽는다.” 그 일이 있은 뒤 김 이병은 축구를 할 때 한 번도 슛을 하질 못했다.
근무가 끝난 뒤 내무반 생활은 더 힘들었다. 이병들은 내무반에서 항상 출입문 쪽에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 했다. 고참들 수발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고참이 담배를 물면 잽싸게 달려가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줬다. 잘 때는 고참들 이불도 이병들이 깔았다. 고참들 군화 닦기, 군복 다림질도 졸병들 몫이었다. 내무반 안에서는 제대로 웃을 수도 없었고 인상을 써도 안 됐다. 고참들에게 졸병들은 갖고 노는 ‘장난감’이자 마음껏 부려먹는 ‘마당쇠’였다.
김 이병이 집합과 구타에서 간신히 해방된 것은 병장이 되고 나서였다. 졸병 때 당한 일 때문에 그는 후임병들에게 잘 대해줬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그들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후임병들이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자신보다는 구타와 폭언을 일삼는 고참들의 말을 더 잘 들었기 때문이었다.
33개월 반의 군 복무를 마치고 사회로 복귀한 뒤에도 김 이병은 한동안 ‘군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 시달렸다.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 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웃기는 소리 한다’고 생각했다.
김 이병은 지금은 중년의 직장인이 됐다. 그의 잠재의식 속에 잊혀졌던 군 트라우마는 28사단 윤 일병 사망 사고를 계기로 다시 깨어났다. 영화 필름 돌아가듯 예전의 악몽이 떠올랐다. 김 이병이 군에 있던 시기는 1990∼1992년이다. 그는 전역한 지 22년이 지난 지금도 구타와 가혹행위가 여전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김상수 사회부 차장 s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