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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채의 사커에세이] 350년간의 ‘오렌지빛 인연’…또 맺을까?

입력 | 2014-08-13 06:40:00

2002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인 거스 히딩크 감독을 시작으로 한국축구와 네덜란드축구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왔다. 베르트 판 마르바이크 감독이 한국대표팀 지휘봉을 잡는다면 네덜란드 출신 5번째 사령탑이 된다. 스포츠동아DB


1653년 표류하다 제주도에 묶인 하멜
2002년 가장 달달했던 ‘히딩크 인연’
그 이후 본프레레·아드보카트…
긴 인연 불구 축구 실력차는 커 씁쓸
마르바이크, 네덜란드 5번째 인연 유력
표류하는 대표팀, 누구 품에 안길까요?

제주도 남서쪽 산방산 앞바다에는 범선 한 척이 뭍에 올라와 있습니다. 1653년 8월 용머리 해안에서 난파된 네덜란드 상선 스페르웨르호를 재현한 실제 크기의 모형인데요. 그 배에는 헨드릭 하멜이라는 선원이 타고 있었죠. 그는 13년 동안 조선에 억류돼 있다가 일본으로 탈출한 뒤 귀국해서 ‘하멜 표류기’란 책을 썼는데, 그게 우리나라를 서양에 알린 최초의 출판물이라고 합니다.

그로부터 약 350년 후, 또 다른 네덜란드 사람인 거스 히딩크가 한국에 도착했죠. 계약서 한 장 없이 훈련도감의 포수로 고용돼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던 하멜과는 달리, 히딩크는 거액의 연봉을 받고 국가대표팀을 이끌면서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다시 한 번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린 인물이 됐습니다.

히딩크가 떠난 뒤로도 요하네스 본프레레, 딕 아드보카트, 핌 베어벡 감독이 대표팀을 맡으면서 네덜란드와의 인연은 계속됐습니다. 최근에는 공석 중인 대표팀 감독직에 베르트 판 마르바이크가 유력한 후보로 떠올라 네덜란드축구와 한국축구의 다섯 번째 만남이 이뤄질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와 네덜란드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지정학적으로는, 유럽대륙의 한쪽 귀퉁이에 위치해 예로부터 프랑스와 독일 같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했던 네덜란드와,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 외세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우리나라는 닮은꼴입니다. 이런 구도는 축구계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한정된 자원에도 불구하고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과거의 역사가 어쩌면 한국인과 네덜란드인의 유전자에 녹아들어 축구판에서도 특유의 끈기와 투지를 발휘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국제대회뿐만 아니라 클럽 레벨에서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는 1990년대부터 외국인, 특히 브라질 출신 선수들이 유럽의 ‘빅리그’에 진출하기 위해 한 번씩 거쳐 가는 교두보로 자리 잡았고, 아약스와 PSV아인트호벤 같은 구단들은 유소년 팀에서 길러낸 자국의 유망주들을 대륙의 명문 클럽으로 수출해왔습니다.

우리 K리그에서 활약하며 아시아무대에 이름을 날린 외국인선수들이 일본이나 중국의 부자 구단으로 이적하는 건 이제 너무 흔한 일이 돼버렸죠. 아직 유스 시스템이 완전히 활성화됐다고 할 순 없지만, 우리의 어린 선수들이 10대의 나이에 해외로 진출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특별한 경우이긴 하지만, 박지성도 PSV를 거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했으니 네덜란드와 우리나라의 인연이 보통이 아닌 건 분명합니다.

물론 네덜란드와 우리나라의 축구를 단순 비교할 순 없습니다. 1970년대에 ‘토털 풋볼’로 유럽대륙을 평정했던 네덜란드는 2010년 남아공월드컵을 기점으로 또 다른 전성기를 맞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1960년대에 아시아 정상에 오른 이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최근 열린 브라질월드컵에서도 부진했죠. 세계무대와 탈 아시아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대륙에서 한국축구의 위상을 되찾아야 합니다.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가오는 아시안컵에서 이겨야 하지만, 현재로선 새로 출발하는 신임 감독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여담이지만 누가 표류하는 대표팀을 풍랑에서 구해낼 선장이 될지는 몰라도, 이번에는 ‘아무개호’처럼 감독의 이름을 딴 별명을 대표팀에 붙이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예전처럼 지도자 한 명이 카리스마로 조직을 휘어잡는 시대도 아니거니와, 외국인 감독이 왔다고 해서 우리가 가진 걸 모두 버리고 백지 상태에서 그만의 축구철학을 주입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지금 신임 감독 1순위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그 분의 성함은 그렇게 부르기에는 너무 길잖아요.

참,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와 네덜란드의 인연이 시작됐던 제주도의 특산품이 밀감인데 네덜란드대표팀의 별명은 귤색과 같은 ‘오란예’(영어로 오렌지)라고 하네요. 묘한 인연입니다.

● 정훈채는?=FIFA.COM 에디터. 2002한일월드컵에서 서울월드컵경기장 관중 안내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면서 축구와 깊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후 UEFA.COM 에디터를 거치며 축구를 종교처럼 생각하고 있다. 2014브라질월드컵에는 월드컵 주관방송사인 HBS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국제축구의 핵심조직 에디터로 활동하며 세계축구의 흐름을 꿰고 있다.

[스포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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