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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부형권]스피드 한국 vs 기다림 미국

입력 | 2014-08-04 03:00:00


부형권 뉴욕 특파원

세월호 참사 직후 한 미국 교포가 e메일을 보내왔다.

‘지난주 집의 전기 사용 용량을 늘리려고 전기기술자를 불렀다. 두꺼비집에 손을 대려면 시(市) 감독관이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시청에 신고하고 전기공사 후 시청의 점검도 받았다. 시 감독관의 방문 수수료로 100달러를 냈다. 작은 전기 일 처리에 9일이 걸렸다. 이처럼 모든 걸 법대로 하니 세월호 같은 비극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교포는 “예전엔 한국에 돌아가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적었다. 주위의 한국인들에게 e메일 얘기를 했다. 반응은 비슷했다. “맞아.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진짜 문제야. 그래도 난 미국에선 못 살겠다.” 머리는 끄덕이지만 몸이 안 따라갔다. 그런 저속(低速)의 나라에서 속 터져서 어떻게 사느냐는 얘기다.

뉴욕특파원으로 미국에 온 지 한 달여. 단단히 각오했지만 속이 탔다.

입국 첫날은 한국인다운 스피드를 보였다. 미리 열어놓은 미국계좌 확인하고 개인수표 발급받고 자동차 빌리고 휴대전화 개통하고 점 찍어둔 집에서 주인 만나 계약하고 입주하고…. 5시간 만에 다 해결했다. 뿌듯했다.

그 속도는 이틀째(7월 3일) 바로 무너졌다. 한국의 주민등록번호 같은 사회보장번호(Social Security Number) 카드를 재발급받으려고 사회보장국을 찾았다. 번호표를 뽑고 3시간 반을 기다렸다. 6개 창구 중 2개만 열려 있었다. 점심시간 땐 1개만 운영됐다. 직원들이 공휴일(독립기념일·7월 4일)을 앞두고 휴가를 떠났다는 얘기가 들렸다. 민원인은 눈대중으로 세도 200명이 넘었다. 한국 같으면 “민원인이 이렇게 많은데 공무원은 다 어디 간 거야”라는 고성(高聲)과 항의가 쏟아졌을 것이다. 그런데 조용했다. ‘미국에는 한가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참 많네. 민원 하나에 하루를 허비하다니….’ 방심은 금물이었다. 창구 직원은 “입국 증명 서류(I-94)를 출력해서 가져와야 신청이 된다”고 했다. “그렇게 간단한 서류면 여기서 뽑아주면 안 되냐”고 했더니 정색하며 “노(NO)”라고 했다. 하루 종일 한 건도 처리하지 못했다. 교포 지인이 “20년 미국 살면서 체득한 건 ‘기다림’이다. 한국 속도를 잊어라”라고 위로했다.

민원 창구 속도 경쟁에서 한국은 미국에 앞선다. 구청이나 동사무소에서 3시간 반을 기다린 기억이 없다. 인터넷이나 무인발급기로 웬만한 업무가 다 처리된다. 스피드는 한국의 성장동력이었다. 이제 숙제는 ‘제대로 빠르냐?’가 아닐까.

출국 직전 자동차를 중고차 매매상에게 팔았는데 자동차세 완납 증명을 요구했다. 동사무소에 가서 신청했더니 직원이 “규제개혁 차원에서 필요 없게 된 지 꽤 됐다”고 했다. 그래도 발급받아 매매상에게 전달했더니 ‘다 안다’는 표정이다. “명의 변경 담당 부서에서는 여전히 그 증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한쪽에서 없어졌다고 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그 ‘없어진 걸’ 요구하는 때가 많다.”

한국의 민원 창구가, 나아가 사회 전반이 빠르면서도 정확하고 일관된다면 차별화된 국가 경쟁력이 될 것이다. 속 터지는 미국 행정이 따라 배우려 할지 모른다. 작은 전기공사에 9일 걸린 교포가 한국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다시 생길지 모른다.

부형권 뉴욕 특파원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