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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고쳐 쓰는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

입력 | 2014-07-18 03:00:00


고쳐 쓰는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
―김점미(1963∼ )

지금 나는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의 통속한 사랑을 읽고 있다
가령, 그녀가 온다면
그곳에서 사랑의 불꽃을 피운다면
새벽녘에 다시 그를 버리고
또는 그에게 버림받고 떠나간다면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는
다시 또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침에
신문의 부고란에서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 죽어간
그녀를 본다면
물살에 떠밀려온 그녀의 빨간색 구두 한 짝을 본다면
각이 지고 그늘진 그곳
마리엥바드의 냉정한 평온함을
다시 본다면, 나는
10년 동안의 속앓이 사랑의 끈
놓아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난해 마리엥바드의 겨울바다는
소나무 한 그루도 남겨놓지 않고
소금기 절절한 이별을
바다 저편으로 쓸어내고 있는데
수평선 너머에서 내게로
밀려오는 쓰라린 석양,
나와 그녀의 젊음의 아세톤 냄새
마지막 손가락의 매니큐어를 풀어
붉게 물들이는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

지금 나는
다시 그 바다의 통속된 사랑을 엮어간다
그녀가 사랑했고
그녀를 사랑했던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






이 시를 읽자니 갑자기 당기는 음악이 있다. 음반은 찾았는데 콘센트에 전축 플러그를 꽂을 자리가 없다. 갈등하다 선풍기를 포기한다. 이제 되었다. 도입부의 철썩이는 파도소리와 함께 소금기 가득한 따가운 햇볕이 살갗에 달라붙는 듯. 달콤하고 뜨겁고 나른한, 장프랑수아 모리스의 ‘모나코’다.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고, 우리는 행복하다고, 사랑이 우리 곁에 있다고, 모나코 해변의 나무그늘에서 엉겨 있을 연인들이 속삭인다. 언젠가 한 사람은 이 순간을 까마득히 잊을 수도 있으리라. 우리는 같이 겪은 일에도 저마다 다른 기억을 갖는다. 기억에 대한 확신은 견고한데, 확인하자고 시간을 거슬러 갈 길이 없다. 그렇게 ‘각이 지고 그늘진 그곳’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 우리는 유령처럼 엇갈리고 떠돈다.

화자는 타버린 사랑의 재 위에서 다시 ‘사랑의 불꽃을’ 피울 꿈으로 ‘10년 동안의 속앓이’를 했는데 상대방의 죽음을, 그것도 신문의 부고란을 통해서 알게 된다.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의 제 질긴 사랑에 이제야말로 마침표를 찍는 쓰라린 심정…. 우수 짙은 시어와 그 정조의 리듬감이 마음을 울린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