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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이슈]김정은 시대 들어 새롭게 떠오르는 北 여가수들

입력 | 2014-04-05 03:00:00

‘평양 소녀시대’ 모란봉악단… 미니스커트 공연 연일 만원




북한 모란봉악단이 지난달 말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모란봉악단의 공연은 김정은과 그의 부인 이설주도 관람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장성택 처형 이후 김정은의 ‘독재자’ 이미지를 희석하기 위해 이 악단을 앞세우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북한 노동신문 홈페이지

“어젯밤에도 불었네 휘파람 휘파람…휘 휘 휘 호 호 호….”

한 번쯤 들어 봤을 북한 노래 ‘휘파람’이다. 이 노래를 부른 주인공은 전혜영(44). 그는 1988년부터 보천보전자악단의 성악배우로 활동하면서 북한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북한 가요뿐 아니라 외국 팝까지 잘 불러 1991년 공훈배우, 1992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공훈배우는 북한 당국이 문예정책에서 공훈을 세운 예술인에게 주는 국가 영예 칭호다. 한 단계 위인 인민배우 칭호는 문예정책과 북한 체제의 유일사상 강화에 기여한 배우들에게 준다. 보통 부부장급(차관급) 대우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 이전에는 영화배우들이 전성기를 구가했다. 북한은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찬양하는 내용인 10부작 ‘조선의 별’(1980∼1987년 제작)의 총 관람객 수가 1억5000만 명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북한 주민이 2000만여 명이었으니 전 주민이 7.5회를 본 셈.

배우들의 전성기가 지난 뒤에는 가수들이 떴다. 당시 북한 가수들은 최고 통치자 앞에서 직접 노래와 연주를 할 기회가 많았다. 김정은이 가수 출신인 이설주를 아내로 받아들인 뒤 가수들이 영화배우 등 다른 예술인보다 더 후한 대우를 받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통치자 취향에 흔들린 걸그룹

전혜영이 활약한 보천보전자악단은 북한에서 체제선전, 우상화 가요 말고도 이른바 ‘생활 가요’라고 불리는 노래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90년대 초반 대중 앞에 등장한 보천보전자악단은 5인조 젊은 여성 가수들을 내세워 선풍을 일으켰다. 전혜영을 비롯해 김광숙 이경숙 이분희 조금화로 대표되는 5인조 여가수는 김정일 시대 북한 음악을 상징한 아이콘이었다. 이 중 이경숙은 2월 금강산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 행사장에 울려 퍼진 북한 대표곡 ‘반갑습니다’를 부른 가수다.

보천보전자악단은 1983년에 구성됐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이 악단은 김정일이 측근들을 모아 여는 연회에 흥취를 돋우기 위해 만들어진 비밀악단이었다. 그러다가 1991년 9월 일본 순회공연을 계기로 대중에 공개됐다. 단원들은 북한 예술인의 최고명예인 인민배우 칭호를 20대 초반에 받으며 10년 가까이 북한 주민들의 절대적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이 악단은 1990년대 말부터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여기에는 노쇠해진 김정일의 취향이 작용했다. 그는 걸그룹에서 조선인민군 공훈합창단으로 눈을 돌렸다. 공연장에서 군복 입은 100여 명의 남성이 김정일 찬양 노래를 함성에 가깝게 목청껏 뽑아내는 것을 들으면 귀가 먹먹해질 정도다. 김정일은 “공훈합창단의 노래를 들으면 힘이 생긴다”며 수시로 합창단을 방문해 소파에 몸을 묻고 한 시간 가까이 공연을 관람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일성이 지배하던 1960, 70년대는 가극이 전성기를 누렸다. 피바다가극단과 만수대가극단이 당대의 대표적 예술단체였다. 이 역시 최고 권력자가 사랑하는 장르였다.

1980년대엔 솔로 여가수들이 무대를 휩쓸었다. 당시에는 최삼숙과 김옥선 등 두 여가수가 북한 음악을 대표했다. 한국 원로가수 남인수의 조카이기도 한 최삼숙은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무대 공연 2600회를 통해 3000여 곡의 노래를 불렀다. 온 나라 인민이 매일 보는 ‘가요계의 여왕’으로 군림한 셈이다.


김정은 시대를 알린 모란봉악단

김정은은 지난달 모란봉악단 공연을 두 차례나 관람했다. 그가 창립된 지 1년 9개월밖에 되지 않은 모란봉악단을 찾은 것은 10회가 넘는다.

모란봉악단은 2012년 7월 창립공연에서 한국의 걸그룹을 연상케 하는 파격적인 복장으로 눈길을 끌었다. 미키마우스와 백설공주, 곰돌이 푸 등 디즈니 만화 캐릭터를 본뜬 인형 의상도 처음 선보였다. 이를 두고 외국 언론들은 “은둔의 왕국 북한이 디즈니 캐릭터를 등장시켜 개방 이미지를 연출했다”고 분석했다. 디즈니 캐릭터는 중국을 통해 들어간 상품과 함께 유입됐고, 북한 당국도 이를 막지 못했다. 2000년대 후반 북한 당국이 공급한 소학생용 책가방에는 미키마우스가 그려져 있었다.

대중 공연에 노출 의상과 디즈니 캐릭터가 등장한 것은 김정은 시대를 알리는 신호 역할을 했다. 북한을 탈출한 주민들은 “김정일 시대의 마지막 10년간 고성만 내지르는 합창단의 노래에 지쳐 있었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이 집권 첫해에 가요계의 물갈이를 시도했다는 게 북한 연예가에 정통한 사람들의 얘기다. 아버지 세대와 완전히 다른 젊은 여성들의 활기찬 노래는 ‘새롭고 즐거운 시대’를 알리는 전주곡이 됐다는 것이다.

북한은 3월 말부터 이달 1일까지 열흘 동안 5000석 규모인 4·25문화회관의 모란봉악단 공연을 매일 평양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개방했다. 걸그룹의 화끈한 공연에 객석은 연일 만원을 이뤘다고 노동신문은 전했다.

모란봉악단은 장성택 처형 이후 김정은의 ‘잔인한 독재자’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공포에 질린 북한 사회의 음울한 분위기를 바꾸려 하고 있다.

현재 모란봉악단은 이설주가 직접 지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젊고 예쁜 여가수들은 이설주가 졸업한 북한 최고 예술인재 양성학교인 금성고등 출신으로 채워지고 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대부분 김정은에 대한 충성을 유도한다.


흔적 없는 한순간의 파멸

최정상에 올랐던 가수들도 ‘한 방’을 두려워한다. 통치자의 말 한마디에 최정상에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은 공포의 왕국에서 자란 육감으로 안다.

지난해 8월 처형설이 나돌았던 은하수관현악단 9명도 예외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악단은 2009년 5월 최고의 가수들을 망라해 창립됐는데 4년 만에 흔적 없이 분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 때문에 이들의 처형설이 불거졌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이 이설주의 사생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설주는 2011년까지 이 악단 가수로 활동했다.

지난해 12월엔 모란봉악단 대표가수인 공훈배우 류진아와 악단장인 선우향희가 장성택의 여자로 밝혀져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는 설이 퍼졌다.

한국 매체에서 이들의 숙청설을 제기하자 북한은 지난달 26일 자체 운영 페이스북을 통해 이들의 근황을 전했다. 북한이 외부의 보도를 반박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조선중앙TV는 4일 메인 뉴스인 저녁 8시 ‘보도’에서 모란봉악단의 양강도 삼지연군 공연 소식을 영상과 함께 전하면서 선우향희의 연주 장면과 얼굴을 근접 촬영해 내보냈다.

보천보전자악단 여가수 5명도 갑자기 북한 매체에서 사라졌다. 이들이 중앙당 고위간부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른 사실이 드러나 지방 농장원으로 추방됐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되진 않았다. 다만 이들 중 전혜영은 2011년부터 만경대 학생소년궁전 성악지도 교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가 2년 전 보도했다. 이러한 근황 공개는 다분히 외부의 의혹을 의식한 것으로 보이며 나머지 여가수 4명의 행방은 여전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주성하 zsh75@donga.com·윤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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